brunch

부모의 역할에 대하여

10주 차- 바람

by 홍그리

시기상 안정기로 접어든다면, 부모에겐 지금이 가장 역동적인 시간이 아닐까 한다. 크기가 커지면서 머리와 손과 발이 자라고, 심장소리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벅찬 감정이 끌어 오른다. 1,2차 기형아검사며, 아직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이 벅참을 온전히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쩌면 눈앞에 닥친 것만 쳐내기 바빴던 내가 진지하게 미래를 그려보는 계기가 생긴 것 그리고 그 계기들 중 이토록 벅찼던 게 있었던가 싶다.

지금 주어진 현재보다 앞으로의 미래가 더 중요함을, 삶이란 단 한치의 예외도 없이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전제를 이미 경험했음에도 이 뱃속의 아기를위해서라도 더 나은 미래를 계획해 본다.


이 아이도 커서는 어떤 미래를 그릴 때 많은 경우의 수를 두고 고심할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 늘 기회비용이 따르고, 본인이 내린 결정에는 그만큼의 책임감이 따를 테니까. 비록 환희로 가득한 나날도 있겠지만 열의 일곱, 여덟은 대개 직관적인 달콤함보다는 어정쩡한 이도 저도 아닌 맛 혹은 후회가 자리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운동을 하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무언가를 계속 해내는 꾸준함은 어쩌면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찾아올 기회에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함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나은 결정을 내릴 순간이 오게 하려면 일단 뭐라도 해야 한다. 그 해야 함은 좋다고 하는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만의 최소한의 기준은 가져가야 하고 내 아이가 그렇게 크길 바란다. 경영학과가 취업 잘된다고 너도 나도 고3 때 경영학과를 선택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사실, 경영학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는 과정에서도 내가 마음이 기울었던 것은 늘 있어왔다.

음악 듣는 걸 좋아해 늘 이어폰을 달고 살았고,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법한 엉뚱한 상상, 그리고 일기를 쓰거나 무언가를 늘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게 있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늘 무언가에 남들보다 조금은 이끌려온 게 있다. 그 이끌려 온 것이 현재 본인을 만든 것이고, 그걸 놓지만 않는다면 계속 그 방향으로 갈 것이라 믿는다. 그럼 내가 내 아이에게 무언가를 도전했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런 환경자체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가까운 일본, 아니 전 세계를 둘러봐도 한국 같은 나라가 없다. 학교에 끝나면 학원을 세네 개씩 뺑뺑이 돌고,자고 다음날 또 학교 가면서 아이들을 끝없는 시험과 평가에 몰아넣는 나라가.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경쟁을 가르치고, 자본주의의 생존방식을 가르친다.

그렇다면 사교육도 안 시키고, 내 아이가 나중에 커서 공부도 잘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성공루트를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끊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는 게 맞는 거냐. 그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부모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방생에 가깝다.

본인이 좋아하는 게 최소한 무엇이고, 어떻게 조금이라도 본인 기준을 지키면서 살아갈지의 정답은 정형화된 시스템 안에서 다름을 만드는 일이라 본다. 사회는 A를 요하는데 A를 하지 않고 B를 주장하는 아이에게 우리는 창의적인 아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 혹은 게으르고 특이한 아이가 더 어울릴지도. 빈지노는 힙합을 하고 싶어 부모를 설득했지만, 부모님은 서울대에 들어가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빈지노는 서울대에 들어가 힙합을 해서 힙합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런 부모가 되어야 한다. 정형적인 시스템을 착실히 하되, 다름을 읽어내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 그게 아이가 혼자 발견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테고 많은 시간이 소요됨으로 그걸 어떻게 부모가 이끌어줄 수 있는지, 발견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가 부모 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무조건적인 디폴트로 가져간다고 했을 때.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칼을 뽑은 사람은 머쓱해서라도 썰 수 있는 무라도 주변에 찾는다. 조금이라도 시도하고 도전하고 했을 때 안되더라도, 대단한 어떤 목적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 한 단계 아래의 뭐라도 하게 된다. 부모는 아이가 칼을 뽑을 수 있도록 지원만 해주면 되는 것. 그 후에 무를 썰든 파를 썰든 그건 아이 본인이 선택하면 되는 일이다. 당연 그 길고 긴 인고의 시간에 한 가지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는 것. 어릴 때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있다. ‘옆집에 누구는~,누구 엄마아들은~’ 이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사람들은 '엄친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누구는 서울대에 가고, 누구는 대기업에 취업해 용돈을 주고, 매년 해외여행을 보내주고, 어쩜 이렇게 본인 주변에는 잘난 사람들만 있는지. 현시점에서는 실제로 주변에 그 잘난 사람들만 있는 게 맞다. 왜냐. 가진 것 없고, 무언가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방안에 틀여 박혀 자취를 감췄거든. 절대 앞에 나타나지 않거든. 잠수를 타고, 인연을 끊고, 다 끼리끼리 살기 때문에 그런 거다.

이처럼 아이는 크면서 수많은 비교군에 노출된다. 나는 헌 신발인데 누구는 나이키 최신 운동화를 신고, 바람막이, 패딩을 입고부터 시작해서 학원에, 집에, 자동차에, 용돈에,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과 타인이 가진 것을 비교하면서 부모를 닦달할지 모른다. 교육을 받지 못해 잘못 알고 있거나, 착각하거나, 나중에 후회하거나, 조금 늦게 알거나 해도 딱 한 가지 아이에게 바라는것은 그 시기가 짧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짧도록 전폭지원할 것이다. 그래야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그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만의 칼을 뽑고, 그만의 무를 선택해 자를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그게 결과가 어떻든 취업 잘된다고 경영학과에 진학하는 것보다는 훨씬 쿨하고 멋진 일이다.


경주마는 달릴 때 옆의 시야를 모두 차단한다. 그걸 차단하는 건 사람이 주체지만, 우리는 그 경주마처럼 타인과의 비교를 철저히 차단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과 꾸준함이 지속된다. 나만의 길은 나만 갈 수 있고, 나만의 속도대로 어쨌거나 골인지점에만 도착하면 되는 거니까. 괜히 옆에 봤다가 내가 뒤쳐진다 낙담하지 않고, 내가 빠르다 해서 자만하지 않도록 그 불행에 내 아이가 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 자본주의에서는 그게 가장 이겨내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이건 내가 그렇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나만의 큰 다짐이기도 하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