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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의 진짜 의미

11주차- 남겨진 것

by 홍그리

미국 시트콤 빅뱅이론에서 물리학자 레너드는 정자를 기증해 달라는 지인의 부탁에 수긍한다. 최종적으로 그 부탁은 거절했지만, 그의 여자친구는 그에게 당시 왜 수긍했냐고 묻자 레너드는 이렇게 답한다.


"적어도 내가 죽고 나서 나만의 흔적 하나는 남겨도 되잖아?"


이 세상에 무언가 나만의 흔적을 남기는 일.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기는 일. 어쩌면 우리는 거기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해 1등, 2등 높은 성적을 올린 무언가의 결과를 남기려 한다. 회사에서는 힘 있는 팀에 들어가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어떤 결과를 남기려 한다. 나랑 똑 닮은 자녀를 낳아 기르려 한다. 이 외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할 때 편지를 쓰는 일, 책을 읽거나 영화를보고 느낀 점을 기록하는 일, 내가 하는 행동하나하나에 어떤 흔적이 남길 바란다. 그래서 누군가는 명품이나 갖고 싶었던 물건 등 소비로 일컫는 것에 여행보다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여행은 갔다 오면 기억을 흔적으로 남기지 않는 이상 남지 않지만, 무언가를 소비하는 일에 있어서는 결국 그 물건이 남으니까.


내가 죽고 나서 내 흔적이 남길 바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결국 모든 인간의 본능일지 모른다. 전 세계위인들 그리고 유명 연예인,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은 그걸 이뤄냈다. 김일성, 김정일은 죽은 시체마저 관에 보관되어 몇천만 국민들이 매번 눈물을 흘리고 그를 간절히 그리워하니 어쩌면 모든 이들의 본능을 이뤄낸 이 세상에 유일한 사람일지 모른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사진을 찍고, 비석을 세우고,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던 유물을 후대를 위해 남겨놓는 일도 어쩌면 이 본능을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여기엔 전제조건이 있다. 무언가를 남기려면 혁신은 무조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내 이름 석자를 알리기 위한 명분은 없거든. 그 혁신은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그 고통의 대가로 이렇게 발전한 현대사회에 우리는 산다. 다 남긴다는 것의 본능을 거스르지 못한 선조들 덕이다.


그 남겨진 것들 중 자녀를 낳고 기른다는 건 이래서 더 특별할지 모른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실수, 시행착오, 좌절,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내 자녀에게는 그 힘듦의 과정이 조금은 덜하고, 기쁜 일이 더 수반되고, 더 나은 세상을 알려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거니까. 내 자녀는 나보다 더 나은 사회에서 살 것이고, 더 나은 경험을 할 것이며, 내가 어떻게 가르치냐에 따라 나보다 더 돈을 쉽게 벌 것이고, 누군가에게 더 친절하고 예의 바를지 모른다. 내 자녀가 이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자녀 또한 그렇겠지.

여기서 변수는 애초에 범죄자라던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도 똑같이 이 과정을 밟는다면 사회악 개체수 자체가 늘어난다는 함정이 있겠지만. 이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보통'사람은 더 나은 삶을 물려줄 것이기 때문에 출산과 육아는 어쩌면 내 흔적을 남긴다는 단편적인 목적 말고도 이 사회에 좁쌀만큼이나마 최소한의 기여를 하는 일일지 모른다.


결국 무언가를 남기는 건 내 후대를 위해서, 내 자녀를 위해서라도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원초적인 건 내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남긴다. 글을 쓰는 것도 그걸 책으로 엮어 돈을 벌어 내가 이익을 남기는 것 이외에도 내 인생을 돌아보고 더 나은 미래로 삶을 정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이익이 있기에 글로 기록하는것이다. 내가 회사에서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면 내 흔적도 남고 그 흔적으로 인해 돈을 벌고 더 내가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결국은 이 본능이 제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근데 문제는 뭐냐.


이 모든 건 결국 모두에게 잊힌다.


한 때 미쳐서 산 몇백만 원짜리 자전거가 베란다에 있으면서 녹이 생겼고, 다이어트를 해본답시고 산 실내자전거는 옷걸이로 쓰기 바쁘고, 이쁘다고 산 신발과 옷은 일이 년이 지나면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유명여행지를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과 그때의 감흥은 자연스레 시간이 흐르며 감각조차 희미해진다. 회사에서내가 아무리 이름을 떨쳤든, 내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회사는 화가 나 울분을 토할 정도로 정상적으로 잘 굴러간다. 오히려 더 잘된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은 헤어지면 아니, 1년만 지나도 기억도 안 난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면서 잊혀간다. 만약 연애경험이 많다면초창기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을 것이며, 길에서 우연히 만나도 얼굴 자체를 기억 못 할 것이다. 공들여서 썼던 연애편지는 그 상대의 수많은 편지보관함에 구겨져 보관돼 나중에 다시 펴보지도않을지 모른다. 이사할 때 나중에 이건 뭐지라며 그 상자를 열어볼 때나 한번 발견할지도. 시간은 내 연차처럼, 적금처럼 적립해 두고 나중에 필요할 때 쓸 수 없는것이기에 조금이라도 의미 있는 시간, 아니 본인이 의미 있다고 믿고 싶으니 모든 게 언젠가 잊혀도 그런 일상의 기록들을 어쩌면 우린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언젠가 다 사라질걸 알면서도.


근데 딱 하나, 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일은 조금 다르게비친다. 높은 확률이 아닌 100% 확률로 나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 격이거든. 분명하게 내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길 수 있고 그 증인이 한 명 생기는 격이거든. 그것도 내 의지와 내 힘으로 태어난 존재다. 그래서 앞서 레너드가 흔적이라는 표현을 썼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나 스스로에게도, 태어난 아기에게도, 공동체에도 기적이고, 선순환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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