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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는 이유

12주차- 자산

by 홍그리

눈뜨고 코를 베어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나치게나이브한 태도는 다소 해가 될 수 있다. 우리 각자는 인생에서 어느 하루는 좋은 일로, 또 어떤 하루는 안 좋은일로 골머리를 앓곤 하는데, 문제는 사실 늘 이 안 좋은일에서 발생하는 법이다.

누가 좋은 얘기, 허허 가볍게 웃음지을 수 있는 얘기 안하고 싶겠나. 좋은 일에는 모두가해피하다. 하지만 불행이 닥치는 순간, 한 개인은 본인 각자의 이익과 손해를 대변하는 데에 가장 우선순위를둔다. 그게 만약 손해일 경우 손해의 인과관계를 따져가며 그럴싸한 대상을 지목해 책임소재를 묻기바쁘다.여기서는 그럴싸한 근거를 먼저 만들거나, 수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목소리 큰 사람이 대개 유리하다. 그래야만 본인은 ‘선량한 피해자’가 되거든. 아무 죄 없는 순박하고 나이브한 마치 순한 양 같은 그런 선량한 피해자. 사회는 피해자신분조차 아무 죄하나 없는 선량 해야만 한다는 무언의 압박과 통제를 가한다. 마치 물건을 절도당한 피해자가 과거에 술자리에서의 시비로 경찰신고기록이 있다고 비난한다거나, 본인과실 없는 교통사고로 전치 8주를 입은 피해자가 과거 경미한 교통사고로 한방병원에 입원했던 기록으로 관리대상이라는 보험회사의 진술이라던가, 부모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보험금을 수령하려는 아들이 평소 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중의 의심을 사는 그런 일들처럼 말이다.

이런 흠결하나 없는 사람은 사실상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도 않으며, 이 없는 대상을 정당화해 소위 선량하지 못한 이 피해자는 온갖 열패감으로 가해자보다 더 피해 보는 세상에서 우린 그렇게 괜찮은 척하며 살고 있다.


자, 그렇다면 결국 믿을 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즉, 내 자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숫자가 주는 가치도 꽤나 가변적이라 한치도 방심할 수가 없다. 모든 자산이 오르는 지금 같은 인플레이션장에서는 누구나 돈을 번다. 금이며, 은이며, 비트코인이며, 국내주식이며, 미국주식이며, 모든 게 버블장이다. 현금 가지고 있는 사람 빼고 주변에서 전부 다 돈을 벌었다. 그런데 그것이 본인의 실력이라 믿는 다수는 곧이어 닥칠 하락장에서 이를 견디지 못하고 돈을 잃는다. 주식이 오르면 주식이 오르는 근거 몇 개 갖다 붙이고, 주식이 떨어지면 떨어진 이유 몇 개 말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미래에 대해 자신 있게 떠드는 주식쟁이들, 영혼까지 끌어모아 서울에 집 하나 등기 쳤다고 마치 본인이 자산가라도 된냥 떠들어대는 대기업 직장인, 전문직군들.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정반대의 말만 늘어놓는 자칭 자산가들 앞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개개인은 막막하기만 하다. 그중에서 그나마 믿음이 가는 건 지속적인 안정적 수입을 가능케 하는 직장의 월급과 꾸준함을 무기로 의미 있는 결과물을 만들고 있는 복리성 숫자들. 하지만 이것도 미래를 아주 보수적이고 극단적으로 예방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언제 잘릴지 불안해 일터에서의 직장상사나 동료들의 온갖 가십거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나날들에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그러면서 현재 내 몸하나 잘 간수하기 위한 집이나 차, 어느 정도의 돈에 안도하면서 이 정도의 삶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까 하며 자위한다.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어찌 살다 보면 이 모든 게 사실 허상이란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내가 죽기 전까지 행복하려면 사랑이란 걸 해야 한다. 마침내 마지막에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 그 답밖에 없다. 돈도, 일자리도, 인간관계도,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사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내 모든 걸 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만난다는 건,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선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린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연애를 하면서 상대를 알아가고, 관계를 쌓고, 결혼을 한다. tv와 매스컴에는 온갖 연애프로그램이 방영되고, 남녀관계를 주제로 한 콘텐츠가 무성한 이유도 어쩌면 이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시행착오가 동반된다.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해서 이별하기도 한다. 상대와 마침내 이별하면 그 아픔은 흙탕물에서 흙을 발라내는 것과 같다. 잊으려 노력하고 나아지려 해도 변함이 없다. 운전을 해도, 똥을 싸도, 공부를 해도, 산책을 해도, 일을 해도 자꾸 미련이 남거나 시련의 아픔이 생각난다. 계속 새 물을 부어 이 흙탕물을 희석시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는 또다시 사랑을 한다. 사랑은 미치지 않고서야 다신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마치 우디 앨런의 영화를 연상케 하듯, 그렇게 한 인간은 사랑 앞에서 구제불능이 된다.

빛이 있는 곳에 빛을 그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둠이 있는 곳에 어둠을 그리면 아무것도 없듯이, 사랑을 갈구하거나 원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을 백날 말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없어져야 결국 깨닫는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위험한 한국사회에서 어떤 한 불특정사람에게 희망을 걸기엔 너무나 비관적인 세상이다. 서로 혐오하고, 시도 때도 없이 자살하고, 가난과 비교,불평등에 힘들어하고. 원래 사람은 얕고 일천하다.

그걸 교육을 통해 좀 더 나은 존재처럼 여겨지도록 각자 비치도록 노력하는 것일 뿐. 본인에게 오는 온갖 유희나 재미, 쾌락, 안정 이 모든 긍정의 의미를 내포한 인간의 감정이 영원할 거라는 큰 착각에 빠져 산다. 무식하게도.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 이게 영원할 거라는 상호 간의 약속, 그 약속에 각자의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나는 결혼이라 믿는다. 배우자를 잘 만난다는 건 내게 주어진 이 하나뿐인 인생에서 온갖 세상이 날 배신해도 이 사람 하나만큼은 날 버리지 않을 거라는 그런 든든한 안정감이다. 그게 곧 내가 오늘도 일을 하고, 밥을 먹고, 글을 쓰고, 공부하고, 잠을 자는 이 일상적인 것들을 계속 참으면서 할 수 있는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래서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 상대를 내 배우자로 결정하는 이 모든 일련의 일은 실로 대단한 것이며 인생에서 가장 큰 결심이라 본다. 거기서 아기를 낳고, 육아를 하며, 가정을 이루고 하는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들이 결국 결혼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파생되는 마치 나무의 뿌리 같은 개념이다.

단순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결혼을 일찍 해서 소비성향이 같은 배우자를 잘 만나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거다. 검소하게 둘이 절약하고, 더블인컴으로 의미 있는 자산을 만드는 게 혼자 주식이니 뭐니 생쇼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취할 수 있는 건 실제로 그게 사실이라 한들 둘째 문제라는 것.근데 이 사회는 결혼도 하나의 경제적 계약관계로만 모두에게 치부되길 원하고, 실제로 모두가 그렇게 믿는다. 소개팅은 상대의 자산의 유무, 집안 수준, 양질의직업이 관계의 긍정적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이 결정적 요인은 사랑이라는 포장아래 암묵적으로 철저히 숨겨진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이 안타까움을 표현하지 않기엔 가슴이 먹먹해 참을 수 없다.

그렇다고 행복하기 위해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좀 더원초적이나 원론적이진 않게 하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나는 결혼이라는 걸 주변에 권유하고 싶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모든 일들을 진심으로 그렇게 축하해주고 싶다.


지인의 청첩장을 받으며 든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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