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고니아> 리뷰
본인의 색깔이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강한 정도가 아니라 타인의 발언을 자르고, 부정하며 본인의 의견만을 관철시키는 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또는 그런 광기 어린 집단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주변에 많지만 익숙해서 그게 광기 어린 집단인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우월감을 드러내는지조차 눈치 못 채고 있는가. 극단적인 정치세력,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집단, 사이비종교세력 모두 포함된다. 그들은 그들끼리 그 안에서의 서열화를 만들고 들끓는 이기심과 욕심으로 스스로 자멸한다. 검은 머리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영화는 이 집단 전체를 인간이라고 통틀어 정의한다. 여태껏 그저 필요악같은 존재라 살려뒀던 것이다. 이 영화의 첫인상은 내게 ‘반성’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짙을수록 우리 뇌와 몸은 굳어진다. 그리고 그 굳어진 뇌 안에서 같은 생각만 반복하며 그 생각이 굳어져 강한 신념이 된다. 가장 무서운 건 이 신념이 그릇된 정보, 일천한 경험 혹은 짧은 정보에서 비롯됐을 때인데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져 관계를 분열시키고 인간에게 혐오심을 자극하며 조직과 개체를 분열시킨다.
인간은 태어나 한 개인에서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이 방대해져 하나의 국가를 형성한다. 그 국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건물을 세우고 수도와 지방을 나누고, 사람들을 이주시켜 각 지역을 맡을 책임자를 뽑는다. 회사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팀장, 실장, 본부장이 존재하는 이유도 애초부터 특정 한 개개인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보통 사람이 7명이 넘어가는 순간 각각 인원을 세심히 관리하기 어려워진다한다. 그래서 한 팀장밑에는 대개 최대 딱 이 정도의 인원만 관리하게 되어 있다.근데 이런 거대한 군집이 어떤 빌런으로 인해 붕괴된다고 생각해 보자. 그 근거는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색깔을 띤다거나, 극단적인 사상가나, 어떤 천재지변으로 인한 바이러스라던가, 정신병자나, 지구는 평평하다고 외치는 음모론 신봉자나, 지독한 독재자나 다양한 이유가 될 수 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주변을 더럽히듯, 이런 한 개인은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혼돈에 빠트린다. 지난 역사가 그랬다. 독재자 히틀러나, 북한정권,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코로나19까지. 주변에는 없을 거라고?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어른 중 정치에 과몰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조금만 극단적으로 치우치면 그 극단성이 폭력성으로 변질돼 집단을 어지럽힌다. 아무리 그게 틀렸다한들, 그 사람들은 절대 본인의 생각과 관점을 굽히지 않으며 본인이 듣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지 않나. 조금만 더대화를 시도하면 그건 본인의 신념과 사상을 부정하는꼴이기에 싸움밖에 더 안 난다.
이런 혼탁한 세상 속 영화는 이 사회를 잔인하고 긴장감 있는 서스펜스로 그려낸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심지어 더 참신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영화가 나오는 타이밍은 온갖 혐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현사회를 깊이 파고든 걸작이며 기막힌 반전은 관객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성공한 미셸은 표리부동의 인생을 살아오며 겉으로는 ESG경영과 환경을 생각하고 다양한 인종을 존중하는 경영을 펼친다고 한다. 허나 실은 직원의 노동을 짜내고 이를 하찮게 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만을 쫓는 악덕 CEO다. 뒤에서는 그녀의 몽타주와 걸맞은 본성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며 겉으로는 온갖 긍정적인 단어로 본인을 덮는다. 이 시퀀스에서 마치 대기업의 그린워싱을 떠올린다. ESG경영 즉, 환경, 사회그리고 지배구조를 아우르는 경영을 한답시고 실제로는 이 사회에 더 쓰레기만 가득하게 만드는 꼴.
이와 동시에 음모론자 테디는 미셸의 기업의 물류업 노동자로, 양봉업도 같이 하고 있다. 순수한 열정으로 그를 따르는 약간 모자란 돈과 함께 산다. 여기서 벌이 점점 사라지는 벌집군집붕괴현상(CCD)을 발견하고, 외계인의 지구침공에 대한 가설을 만든다. 그리고 이 외계인은 미셸이고, 그 확신에 대한 근거를 긁어모으기 시작한다. 그렇게 미셸을 납치한다. 테디와 돈은 집요한 자기 세계로 그의 황제를 만나 이 지구를 구원하고자 얘길 해보고자 한다. 이 기괴한 행동은 각기 다른 원인에서 발현되는데, 테디는 사랑하는 부모로부터의 복수, 돈은 테디로부터의 보살핌과 따른 복종이다. 이 둘이 원했던 건 결국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이지만 인간의 넘치는 이기심으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자멸이 당연하다는 외계인들의 주장과는 사뭇 상반된다. 부모가미셸 회사의 실험군으로 잘못돼 몸이 아프고, 보안관이 베이비시터 때의 본인에 대한 행동 이 모든 가정파탄을 외계인 미셸의 침입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 믿는다. 확증편향을 가진 환자에 가깝다.
납치를 통해 미셸을 추궁하지만, 이 둘의 대화에는 진전이 없다. 미셸이 아무리 본인이 외계인이 아니라 해도, 이는 테디 본인의 사상을 부정당하는 것이기에 미셸의 변명은 아무런 의미 없이 그를 흥분만 시킬 뿐.
결국 미셸은 테디를 속여 계산기에 숫자를 입력 후, 황제를 만나게 해 주겠다며 옷장에 들어가게하고 테디는옷장에서 자폭한다.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미셸은 사고 이후, 옷장에 들어가 실제로 외계인의 세계에서 실제로 평평한 지구의 인류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보호막을 제거시키고, 지구에 있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 그렇게 극적인 반전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인간의 멸종이 결국 타 생명체에겐 이익이라고 그는 판단한 것에 대한 행동인 거다.
20년 전 원작 <지구를 지켜라>는 지구 자체를 통째로날려버렸지만 이런 리메이크는 인간의 멸종이 타 생명체에겐 평화고 희망의 시작임을 이중적 결말의 의도로보인다.
미셸은 결국 인간은 자기 파괴적 본성이 해결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인간을 모두 죽였다. 이 말이 결국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왜 마지막에 결국 다 포기하고 죽였어야 했는지 감독이 나타내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으려고 질서와 상식과 규칙에 의거해 국가를 봉쇄했던 코로나19를 떠올려보면 답이 얼추 나온다. 인간의 이기심은 주어진 환경이나 사회문화, 인간을 둘러싼 모든 존재자체를 구조화시키는 것이며, 그 구조화가 낳은 것이 현대사회의 지금 이 결과물이다. 인류발전의 결국 본질은 인간의 이기심이 중심이었고, 오늘도 그 구조화 속에서 본인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하루의 일상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직장인과 자영업자가 그렇듯.
영화는 이 잔인함을 조금 둘러 벌에 비유했다. CCD는 벌집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처럼 일벌이 사라지는 걸 뜻한다. 2006년 말 미국에서 처음 발견되었으며 원인은 살충제나, 각종 환경오염이다. 이 또한 인간이 주체고 인간의 멸종만이 타 생명체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영화의 논리와 맞아떨어진다. 폐쇄성의 군집이란, 결국 그 폐쇄된 세상 안에서의 개체를 또다시 서열화한다는 거다. 현실세상에 비유하자면 인간이겠지.
본부장, 팀장, 부장, 대리, 주임, 이렇게 나뉘는 것처럼.바뀌지 않는 인간의 구조화에 지친 미셸의 결단이 시사하는 바는 결국 ‘인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가장 우월한 유전자를 주었지만 인류의 자멸이라는 비극적인 서사를 맞는 인간.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한 인간으로 태어난 각자의 대중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오한 물음에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찬바람과 함께 적적해진다. 테디처럼 본인이 피해 보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용기까진 바라지 않는다. 빌런으로 나온 외계인 미셸마저 배울 점이 있거든. 단순히 엠마스톤의 환상적인 연기 말고도 비굴함에 당당하게 그 어떤 위협적인 순간에도, 당당히 본인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와 합치를 이끌어내려 하지 않나. 그리고 기회를 주지 않나.
적어도 우린 이기심에 미쳐도 최소한 누군가를 바르게설득할 신념하나는 가지고 살고 있는가. 대체 내 인생에서 어떤 부분이 꾸며지지 않은 진실일까. 가면은 언제 벗을 수 있는 걸까. 인간은 인간을 결국 구원할 수 있을까. 자기검열은 때론 필요한 순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