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회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 중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의 생명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의 인격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가?
성경은 생물학적 죽음만 살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의미로 삶 자체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게 만든 것도 살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민수기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살인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 ‘라차흐’는, ‘혼을 죽이는 행위’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당시 사회에서 성폭행당한 처녀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것과 같았고(신 22:25-27), 수치스러움으로 인하여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이때 ‘라차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그렇게 한 것은 그 처녀를 죽인 것과 같다는 것.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살인이 이웃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한다. 직접 흉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사랑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죽어 가고 있는데, 이것 역시 살인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과연 해봤을까?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냉담함’일 것이다. 우리는 자기에게 직접적인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은 하고 싶어 하지 않고, 피해가 올 것 같은 일들은 외면한다. 그러면서도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제노비스 신드롬’(Genovese syndrome; 방관자 효과)이라는 말이 있다. 1964년 뉴욕 퀸스에서 제노비스라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밤늦게 괴한에게 습격당하여 살해된 사건에서 생겨난 말인데, 이 여성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35분 동안이나 괴한에게 쫓겼고, 세 번씩이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습격당하는 것을 본 사람이 38명이나 되었다는 사실. 그들은 이 사건을 목격했지만 그중 아무도 경찰에 연락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뉴욕 타임스에서 “현대인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면에 톱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을 두고 뉴욕에 살고 있던 라타네(Latane)와 달리(Darley)라는 심리학자는 왜 38명의 목격자가 아무도 제노비스를 돕지 않았을까에 대해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을 도와줄 개인의 책임감이 분산되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한 사람의 행인이 있는 곳에서 한 대학생이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척 연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85퍼센트의 구조를 받았다. 그러나 5명의 행인이 있는 상황에서는 겨우 31퍼센트의 구조를 받았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곳에 여러 사람이 있으면 책임감을 덜 느낀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을 돕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무관심 때문에 책임감이 분산되어서 어딘가에 죽어 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나는 한 번이라도 해봤을까?
우리의 무책임과 냉담함 때문에 누군가가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은, 동시에 우리의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죽어 가던 누군가가 살아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설교를 듣던 중,
이 시대에 대한 통찰이 많이 와닿아서 원문 내용을 조금 편집하여 올려본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좇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 것 같으면 빠르게 피해버리는 게 지혜이고 현명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도 그렇게 살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그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과연 모두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걸까?
이런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당장 대단한 봉사활동을, 구호활동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금 내 주변에 있는 내 가족, 친구 또는 잘 알지 못하는 지인 중의 한 명일지라도 그들을 지금보다 좀 더 귀하게 여기고, 말 한마디라도 그들의 영혼에 힘이 될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세상이니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특히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마음 쓰고 손을 내미는 일이 어려운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를 먼저 지키고 나를 우선으로 하는 것도 맞는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어쩌다 한 번씩은
내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다른 이에게 양보하거나, 나에게 조금 피해가 올 수 있을지라도 다른 이를 돕는 선택을 해보는 우리가 되길. 서로에게 잣대를 세워 판단하고 경계하기 보다, 조금만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