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뉴스를 좋아하진 않지만 가끔 매체를 통해 흐름을 파악하는 정도로 접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느끼는 건, 소위 정치판에는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직 각자의 '명분'과 '주장'만 있을 뿐. 누군가 말하길 정치의 속성은 합하는 게 아니라 분리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 그의 생각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안타깝게도 오랜 시간 속해 있었던 커뮤니티도 지금 딱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부처럼 단 둘이어도 갈등이 생기는데 하물며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잡음이 전혀 없을 순 없다. 만약 잡음이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완전한 독재자형 리더가 장악하고 있거나 아니면 모두가 방관자이거나.
사람 사이라는 게 좋을 땐 한없이 좋다가도 막상 갈등이 생기니 서로에 대한 놀라운 면을 보게 됐다. 적잖이 충격적이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우린 서로를 깊이 알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길게는 10년이 넘게 봐왔지만 세월이 무색해질 만큼 사실 피상적인 관계였을 뿐이었다.
아무렴 사회에서 누가 굳이 쉽사리 자기 속내를 드러내겠나 싶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또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대부분 우리는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내가 알던 좋은 사람은 그 가면을 쓴 사람이다. 갈등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은 사실 그동안 내가 마주했던 가면을 벗은 동일한 사람이 서있는 것일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충격에 오래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아마 상대방에게 나 또한 그런 충격을 주고 있을 테니까.
최근 몇 달간 갈등을 겪으며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모든 말들에 '사실'을 입증할 수 없기에 더욱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은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합리적 의심'이라는 '확증 편향'만 난무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시작은 주먹 안에 눈뭉치 정도였는데 이제는 커다란 눈덩이가 돼버렸다. 대화의 자리에서는 일말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고찰이 아닌 굳이 할 필요가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돌이킬 수 없는 말들까지 내뱉는 것을 보면서 슬픔이 밀려왔다.
집단에는 언제나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 소수를 제외한 다수는 주로 동조자 역할을 한다.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려 하기보다,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의 주장에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정황만 함께 내세우는 모습을 보았다. 아주 잠시라도 멈춰 서서 생각을 가다듬어 보면 빤히 보이는 것들 조차 애써 눈을 감는다.
어떤 주장이 신념이 돼버리면 사실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사실은 신념을 위협하는 요소가 되어 저항감이 발동한다는 말을 들으니 저들의 모습이 확연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혹여 우리도 그런 건 아닌지 계속 되뇌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주장에 대해 나름의 근거를 대며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조차 자칫 '확증 편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일을 통해 삶을 배운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언제나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특히 사안이 위중할수록 더욱 그렇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독자님이 정치인이시라면 좀 입장은 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끝나지 않은 상황은 매일 밤 잠을 설치게 만들고 많은 후회와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온 지금은 애써 '이 일을 통해 나는 무엇을 느끼고 배우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중이다. 슬픔의 감정이 흘러가도록 뒀더니 흘러가기는커녕 자꾸 차오르다가 이제는 넘실거려 아무래도 쏟아버려야 할 지경이다.
인생에는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고 한다. 그리도 어떤 상황도 결국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상처는 남겠지만 이 또한 모두에게 성장의 거름이 되길 바란다. 어쩌면 우린 모두 미성숙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