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 일기

여행은 마법에 빠지는 순간이다

by 알레

여행의 3일 차. 이제 3박 4일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굵직한 계획은 2일 차까지 모두 완료했다. 이제 남은 하루는 뭘 하는 게 좋을까?


오키나와의 북부까지 다녀오는 일정으로 밤늦게 귀가한 탓에 피로감이 밀려왔지만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를 그냥저냥 보내긴 싫어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아내와 새로운 일정을 짜기 위해 맥주 한 캔을 땄다. 문장의 결론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원래 하루의 노고 끝에는 맥주 한 캔이 따라와야 제맛이지 않나.


일기예보상 셋째 날도 비가 올 것 같아서 더욱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날씨는 하늘에 맞기 기로하고 3일 차엔 아이가 원하던 바닷가에서 놀기와 아내가 바랬던 철판구이 스테이크집에 가는 걸 가장 큰 계획으로 정했다.


전날의 피로와 기분 상 피로를 씻어주는 듯 하지만 정작 피로가 더 쌓이는 맥주 한 캔 덕분에 아침에 겨우 눈을 떴다. 여행을 떠나면 매번 신기하다고 느끼는 건, 평소엔 챙겨 먹지 않던 아침 식사를 꼭 챙긴다는 것이다. 셋째 날 아침에도 본능적으로 눈을 뜬것 같다. 이번에도 바구니에 가득 조식을 담아 올라왔다. 다 먹고 났더니 밀려오는 식곤증에 결국 다시 잠들어버렸다는 게 반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거르지 않고 아침을 먹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낮 12시가 지났다. 아내도 피곤했는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아이만 혼자 신나게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아내가 깨워 겨우 일어났다. 이대로 하루를 공칠 수 없어서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근처 해변으로 갔다.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해변인데 가볍게 모래놀이를 하거나 발을 담그기에 좋다는 평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해변 바로 옆에 아내가 가자고 했던 철판 스테이크 집이 있었다.


일본에서 구글맵으로 네비를 켜고 운전을 하면 가장 아쉬운 건 마지막 디테일이다. 자국 네비가 아니다 보니 그 한 끗 차이로 최종 목적지에서 살짝 빗겨 난 곳을 안내해 줄 때가 있다. 해변 주차장도 결국 두 번 옮겼다. 첫 번째 장소는 해변과 이어진 해안 산책로 쪽이었고, 두 번째 장소는 바로 맞은편이 메인 주차장인데 그 옆으로 안내해 주는 바람에 두 번이나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타는 작은 해프닝도 일어났다.


제주도처럼 오키나와도 바람이 많이 부는 섬인 것 같다. 다행히 추운 바람은 아니어서 견딜 만은 했는데 평소에도 비염으로 콧물이 나던 아이가 신경 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그저 바다면 다 상관없다는 듯 해변에 자리를 잡는다.


해변 위치가 공항 근처라 착륙하는 비행기를 머리 위에 두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인생샷 한 번만 남기고 놀자고 이야기를 했지만 극구 싫다고 했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아이에겐 그 모든 것이 바다에서 노는 시간을 빼앗는 제안으로 들렸겠다 싶다. 실상 식당 예약 시간까지 1시간 정도밖에 여유가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예약 시간에 맞춰 일어나자고 할 때 상당한 저항이 있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아이를 놀지 못하게 막아 세우는 악덕 부모인 줄 오해할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해변에서 놀기로 거듭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혹시나 싶어 예약을 했던 건데 막상 식당에 도착하니 그 시간엔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통으로 대관한 셈이 되었다. 덕분에 좀 전에 놀던 해변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눈앞에서 맛있게 구워주는 철판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었다.


아내가 이곳을 꼭 가고 싶었던 이유는 10년 전 기억 때문이다. 그때 먹었던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었던 기억에 오키나와에 가면 꼭 다시 가고 싶었던 식당이었다. 물론 그때와 다른 지점으로 방문한 것이긴 한데 뭐랄까, 그때와 같은 감동은 없었다는 게 솔직한 후기였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봤지만 아무래도 10년이면 이미 너무 많은 변수가 생길 수 있는 시기이니 그저 '아쉽다' 정도로 평을 마쳤다. 그래도 아이는 맛있다고 다음에 또 오자고 하는 걸 보면 이걸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해가 지고 있었다. 바람은 더 세진 듯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는 신나게 놀았다. 나는 식당에서 선물로 준 상어 모양 잔에다 열심히 바닷물을 퍼 나르며 아이가 만든 모래 구덩이에 채워 넣어야 했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아이랑 바다에서 노는 방법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결국 아빠들이 가장 바쁠 수밖에 없다.


구름이 많지 않았으면 멋진 노을 풍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구름 사이로 타오르는 노을의 한 자락만을 감상했다. 그래도 아이와 함께라서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노을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오키나와의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그 자체로 특별하게 다가왔다.


더 어두워지기 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들은 더 놀겠다고 떼를 썼지만, 이번엔 호텔 루프탑에 있는 온수 스파에 다시 가자는 말로 꼬셨다. 참고로 아이는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가 맞는지, 혹 두 번 생은 아닌지 가끔 궁금하다.


이렇게 3일간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3박 4일. 참 짧지만 그런대로 또 알차게 보낸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10년 전 아내와 함께 꼭 이루고자 했던 꿈을 이룰 수 있어서 감사했다. 낯선 땅에서 운전도 하고 매일 밤 AI를 활용해 다음 일정을 짜고, 또 번역을 해가며 평소보다 느린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돌아보면 다 추억거리로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 옆에 위치한 숙소여서 창을 열면 끊이지 않는 비행기 소음에 시끄럽고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여행이라 그마저도 아이랑 함께 볼거리로 받아들이는 나 자신의 관대함이 신기하기도 했다.


비록 돌아오는 날 체크아웃 후에 아내가 먹어보고 싶다던 팬케이크를 먹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공항에서 둘째 날 먹지 못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던 건 만족스러웠다.


항공편 지연으로 저녁이 되어서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도착 후 공항에서 먹은 김치찌개 맛은 세상 이보다 더 맛있을 수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따뜻한 가을의 날씨에 머물다가 겨울의 맹추위를 맞닥뜨렸을 때의 당황스러움과 괴리감은 공항 셔틀을 기다리는 10분이 100분처럼 여겨지게 했지만 역시 이 또한 여행이라서 경험할 수 있는 낯섦이고 이야깃거리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자고 일어나 맞이한 하루.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여행을 떠나기 전과 같은 일상을 보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몸놀림과 사고의 흐름에 나 자신이 놀랄 정도였다. 아무래도 여행은 마법에 걸리는 순간인 듯하다. 현재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 모든 것에 관대해지고 조급함보단 여유와 만족감이 하루를 채운다. 이해할 수 없는 말들과 익숙하지 않은 삶의 시스템조차 모험의 순간으로 다가온다.


다음엔 또 어디로 가볼까? 가까운 일본이라면 뭐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전에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다음번엔 꼭 메뉴판 가격을 보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리라 다짐 아닌 다짐도 해본다.


아이에게 많은 경험을 안겨줄 수 있는 아빠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삶의 시스템을 갖추고 싶다는 욕구도 커졌다. 앞으로 여행을 종종 다녀와야겠다. 이보다 더 강한 동기부여는 없는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나는 지금 여행이라는 마법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