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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은 백돌이

by 혼란스러워

내 이름은 ‘백돌이’다. 주인 아들 녀석이 지어줬다. 이름만 봐선 남자라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난 암컷이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남녀평등 시대가 아니던가. 내가 여자라고 꼭 ‘백순이’로 지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난 시골에서 태어나 한 달을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 우리 엄마는 다섯 살에 나를 포함 세 자매를 낳았다. 덩치가 작은 엄마를 닮아 우리 자매도 아주 작은 강아지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보는 사람마다 우리가 귀엽다고 호들갑을 떨고, 사진을 찍어대곤 했다. 그러던 중 지금의 주인을 만나게 됐다.


내가 태어난 곳은 내 집사의 친척집이었다. 집사가 태어난 본가와 가까워서 내가 걸어 다녀도 될 정도다. 우리 엄마도 어디선가 그 집으로 아기 때 입양돼서 5년을 살았다고 한다. 팔십 대 중반을 넘긴 주인 할아버지는 우리 엄마를 무척이나 아끼셨다고 한다. 사륜전동바이크를 타고 다니셨는데 그 바이크 시동을 걸면 우리 엄마도 폴짝 뛰어올랐고 할아버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같이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그 동네에서 우리 엄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내가 사는 용인까지 오게 된 건 집사 아들이 나를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 덕분이다. 우리 자매를 보고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세 자매 중 내가 선택된 건 집사 아들 눈에 내가 가장 약해 보였기 때문이란다. 내가 막내로 태어나 언니들의 기세에 눌려 엄마 젖을 덜 먹고 자라서 덩치도 약간 작고 성질도 제일 순하긴 했다.


태어난 지 3주 된 주말에 지금 집사 식구들을 처음 만났다. 그때는 우리가 아직 엄마 젖을 먹을 때라 난 우선 ‘찜’당하고 데려가는 건 다음에 오기로 했다. 주인 할아버지는 어쩌자고 흔쾌히 날 데려가라고 하셨다. 심지어 언니 중 하나와 같이 둘을 데려가라고도 하셨다. 집사 식구는 둘은 힘들다고 하며 나만 데려가겠다고 하고는 돌아갔다.


엄마와 언니들과 헤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마당과 뒷산을 버리고 닭장 같은 아파트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인자하고 사랑 많으신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 동네 이웃분들과 헤어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음이 심란해서 엄마품에서 빠져나와 마당을 거닐었다.


닭장에 웅크리고 있는 암탉이 고개를 돌려 날 지켜봤다. ‘꼬고고고곡’ 소리가 마치 “무슨 일 있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라고 묻는 것 같았다. 뉘엿뉘엿 해가 지는 서쪽 하늘엔 붉게 물든 양털 구름이 옅게 깔려 있었다. 닭장을 지나 반대편 쪽으로 가니 우리가 가지고 놀던 헌 신발짝과 돼지 뼈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곳을 돌아 염소들이 사는 집 앞에 왔다. 까만 흑염소 몇 마리가 되새김질을 하며 노랗게 뱀눈을 뜨고 날 쳐다본다. 염소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수염이 자란 할아버지 염소가 다가와 이마를 들이댄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공격할 태세를 보이는지 가뜩이나 심난했던 마음이 더 울적해진다. “이제 저 떠난다고요.” 그 말을 던지고 염소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난 작은 케이지에 갇힌 채 차를 타고 한 시간 반쯤 달려 용인으로 왔다. 주차장에서 아파트 입구까지 가는 동안 케이지 밖으로 보이는 건 아파트 창뿐이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에레베이터를 타고 지금 집으로 들어왔다. 에어컨이라는 것을 켜니 엄청나게 시원했다. 습기도 없고, 아니 이런 세상이 있단 말인가. 마당에서만 살다가 인간이 사는 집안에 들어오니 쾌적했다. 엄마와 언니들은 금세 잊어버렸다.


케이지 문이 열리고 난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저쪽에서 덩치 큰 무언가가 다가왔다. 고양이였다. 고양이가 매서운 눈으로 날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꼬리를 세우고 다가와 앞발로 날 툭 건드렸다. 일단 조심하는 게 상책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차를 타고 먼 길 이동해서 멀미를 하는지 잠이 쏟아졌다. 주인이 깔아준 방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잠을 청했다. 한숨 자고 나니 몸이 좀 가벼워졌다. 고양이는 계속 날 노린다.


난 태어나자마자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낯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 집사 내외와 아들에게 꼬리를 돌리며 달려들어 애교를 떨었다. 모두들 좋아했다 날 번쩍 안아 들고 계속 쓰다듬어줬다. 고양이의 매서운 눈길을 외면한 채 내 몸을 사람들에게 맡겼다. 일단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고양이는 나중에 생각하자. 덩치는 크지만 겁먹지 말자 엄마는 덩치가 크면 반드시 허점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우리 엄마는 덩치는 작아도 동네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는 야생동물과도 싸웠고, 집에 있는 염소들과도 싸웠다. 닭과도 수없이 싸웠는데 우리 엄마에게 희생된 닭이 세 마리나 된다고 들었다. 엄마는 덩치가 작으면 깡으로 버텨야 한다고 하셨다. 난 쫄지 않으리라. 일단 녀석의 성격과 약점을 파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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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