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대추나무가 몇 그루 있다. 매년 대추 열매가 보기 좋게 주렁주렁 달리고 무더위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대추 열매도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연한 상추 색깔이 점차 옛날 제사 지낼 때 쓰던 제기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며 그 맛을 예상하기도 한다. 그때쯤이면 사람 손이 닿는 부분부터 열매가 하나 둘 없어진다. 사람들이 지나가며 닿는 것을 하나씩 따 먹기 때문이다.
높은 곳은 도저히 딸 방법이 없으니 지나갈 때마다 눈으로만 보고 “아~ 참 맛날 텐데.” 하면서 아쉬워할 뿐이다. 작년 어느 날엔가 내일쯤 열매를 따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가보니 대추가 한 알도 안 남고 사라졌다. 올해도 누가 다 따가기 전에 빛깔 좋아 보이는 저 대추 맛을 봐야 하는데 막대기 같은 걸로 털 수도 없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냥 눈으로만 보고 맛은 마트에서 산 대추로 봐야겠다.
그 대추나무 밑을 지나며 열매를 볼 때마다 장석주 시인의 시 <대추 한 알>이 생각난다. 그 작은 대추 한 알이 저절로 붉어졌을 리 없다며, 붉게 익어가는 데 태풍, 천둥, 벼락, 번개 몇 개가 힘을 합쳤을 것이라는 시인의 표현에 그 시를 처음 읽자마자 무릎을 쳤다. 대추는 유독 뜨거웠던 여름을 잘 이겨내고 올해도 어김없이 붉게 물들어간다. 대추 한 알도 그럴진대 사람의 삶도 저절로 살아질 리 없지 않은가.
대추가 붉게 물들어가듯 나도 나이를 먹어간다. 모든 치열했던 일들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치열한 투쟁과 사랑과 고통과 쾌락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내가 저절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