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유 박사와 인사를 나눈 뒤, 아래층에 있는 연구실로 향했다.
‘증발’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는 소년에게 유 박사는 보건국 감정통제연구실의 김유미 박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괴로운 기억과 감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기억을 선택적으로 제거하는 임상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 연구가 어쩌면 ‘증발’과 유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 유 박사가 추천한 이유였다. 유 박사는 김 박사의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 “지금 소년 한 명이 내려갈 예정인데, 임상 연구 대상자가 될 수 있을지 상담을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304호
감정통제센터 연구원 김유미]
김유미 박사의 연구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한 김 박사가 문을 열었다. 연구실 안에는 벽을 가득 채운 철제 캐비닛과 책상, 그리고 의자 두 개와 삼각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실내에 서늘한 기운이 맴돌아서 소년은 재킷깃을 여미었다.
“안녕… 하세요?”
“그래. 유 박사님께 연락받았다. 견디기 힘든 일이 있었나 보구나.”
김 박사는 의자 쪽을 가리키며 소년에게 말했다.
소년은 자리에 앉은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이 힘든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 세상에 내가 꼭 있어야 할까, 그런 생각이 가끔 들어요.
나 하나 없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요.”
“그게 마음이 힘든 거란다. 지금 누구와 살고 있니?”
“엄마요. 아빠는 교정시설에 계세요.”
“교정시설에? 왜?”
김교수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심한 중독 증상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아주 어렸을 때는 실종되셨다고 얼핏 들었어요. 그러다 중독된 상태로 발견돼서 치료를 받으러 입원하셨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 상태이신지도 모르겠어요. 연락도 되지 않아요.”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니?”
“사실 아빠가 기억나지도 않아요. 게다가 우리 반 친구들도 부모님이 다 멀쩡한 경우가 별로 없어요. 저도 별다를 건 없는 처지일 뿐이죠.”
“엄마는 잘 계시니?”
“엄마는 집에서 약물 치료를 받고 계세요. 아주 어렸을 때… 한 다섯 살쯤, 여섯 살쯤이었나? 그때까지는 엄마가 괜찮았던 것 같아요. 엄마와 대화하거나 함께 놀았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기도 해요.”
“그럼 집에서 제대로 된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컸겠구나.”
“그래도 제가 말을 배울 때는 엄마랑 소통이 잘 됐나 봐요. 언어 발달은 로봇에게 양육받은 친구들보다 훨씬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모니터링 시간에…”
“그래… 다행이네.”
잠시 찾아온 침묵의 틈, 소년은 연구실을 둘러보다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저렇게 큰 캐비닛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연구실 벽을 가득 메운 캐비닛을 가리키며 소년이 물었다.
“임상 연구 진행자들의 데이터를 모으고 있어.”
김유미 박사가 캐비닛 하나를 열어, 가득 쌓인 종이 서류를 한 움큼 들어 올려 보였다.
“종이네요? 사실 학교에서도 종이를 보기가 쉽지 않아요. 모두 패드와 전자펜을 사용하니까요.”
김 박사는 소년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힘든 기억과 감정 때문에 이곳을 찾아오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울다가 웃기도 하고, 절규하다가 정신을 잃기도 해. 저 서류들에는 그들의 인적 정보와 인터뷰 내용, 정서 조작 전의 데이터와 조작 후의 데이터가 모두 담겨 있어.”
그녀는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조작 후에도 두 번 정도 추가 모니터링을 해. 대상자들을 직접 만날 수는 없어서, 국가 전산망에 등록된 정서 모니터링 대화 기록과 모니터링 결과, 생활 패턴 자료 등을 받아서 분석하지. 그렇게 기억 조작 이후에 일상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사후 모니터링 두 회분의 결과지도 출력해서 저 캐비닛에 넣어두지. 사실 모든 기록이 전산망에 다 입력돼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이렇게 종이로 출력해서 캐비닛에 넣어두는 게 더 마음이 편하더라고.”
소년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죠?”
“감정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스러져 가는 사람들을, 내가 살려내고 있어. 제2의 인생을 선물하는 셈이지. 내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지 잊지 않기 위해, 서류를 출력해 캐비닛에 넣기 시작했어. 하나둘 쌓이다 보니 캐비닛이 하나가 되고, 두 개가 되고… 이제는 연구실 벽을 다 채웠단다.”
가득 찬 캐비닛을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김박사는 말을 이어갔다.
“유현 박사님이 강한 신체와 정서를 가진 ‘새로운 인류’를 만든다면, 나는 이미 망가져 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있는 거지.”
김박사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박사님은… 힘든 적이 없으신가요? 박사님은 정말 강하신 것 같아요.”
그 말에 김 박사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난 한 사람일 뿐이야. 너도 그렇지?”
김 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지난 산업혁명을 거치며 무고한 주변인들을 많이 잃어야 했지.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아주 강한 사람이었어. 정서 모니터링에서도 늘 상위권을 유지했지. 나는 저 사람들과는 달라. 저 사람들이 패배자라면, 나는 구원자야.”
김 박사는 캐비닛을 바라보던 시선을 서서히 소년에게 옮기며, 거만한 표정을 되찾았다.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저는 마음이 너무 힘들다거나, 무너질 것처럼 슬프거나… 그런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가끔 너무 답답하고, 도망치고 싶고… 그런 마음 정도요. 그리고 스스로가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저도 저들처럼 나약한 사람인 걸까요? 저희 부모님도… 나약한 분들이시니까요.”
“아마 그럴 확률이 높을 거야. 그래도 지금까지 교화 대상이 되지 않고 지내는 걸 보면, 정서 모니터링은 잘 통과하고 있는 것 같은데?”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웃었다.
“네. 그냥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있으면, 모니터링 결과는 잘 나와요.”
“신기한 케이스구나. 아직 너무 어려서… 힘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겠네. 지금은 감정 조작 대상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김 박사는 의자에 앉은 소년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어. 어릴 땐 세상을 잘 모르다가, 조금씩 커가면서 나를 찾아오는 경우지.
대체로 10대 후반쯤? 엄마의 무표정이나 아빠의 착란 증상이 마음속 깊은 상처로 남았다고 말하곤 해.
참, 어찌나 약해 빠졌는지… 그래도 감정 조작 치료를 받으면 교화 대상이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여길 찾아오는 거겠지.”
소년이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했다.
“박사님은 강인하셔서 너무 좋겠어요. 아픔도 겪으셨는데… 저는 아마 그렇게는 못 되겠지요.”
그 말을 들은 김 박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흥분이 치밀어 오르는 듯,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며 마치 연설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있는 거야. 너 같은 나약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하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그들을 구해 줄 수 있겠니? 사실 다들 그런 나약함과 우울이 전염된다고 생각하잖아. 사회 전체가 그들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 너도 느껴서 알고 있지? 그나마 내가 있으니까 이 사회가 유지되는 거야. 모두가 약물 교화 대상이 되어버리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니?”
김 박사는 큰 몸짓으로 웅변하듯 말하고 있었다. 그 돌연한 열기에 소년은 몸을 살짝 웅크렸다.
잠시 후, 김 박사는 캐비닛 앞으로 다가가 서류들을 뒤적였다. 그러다 한 뭉치의 서류를 발견하자, 그녀는 그것을 들어 올리며 소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 남자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어.
물론 자살이 범죄가 되고, 로봇 감시가 강화된 이후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기회도, 용기도 없었지.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교화 대상이 되어 약물을 투약받기 직전에, 나를 찾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