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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by 무지개인간

'아이를 키운다'는 말은 아이와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육아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여긴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하루만큼의 정성을 다하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붙이지 않은 채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아이를 키우는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를 결국 스스로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자라도록 돕는 일,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때때로 육아는 끝이 없다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부모의 영역인지 애매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역할을 고민하게 된다.


하루만큼의 정성, 아침마다 채워진 에너지의 크기는 다르지만 남김없이 나눠주는 것은 늘 머릿속에 아이는 나와 다른 존재, 독립을 위한 육아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아이에게 오는 독립의 기회를 용기 있게 응원해 주기로 했다. 두 아이의 '독립 연습'이 지나간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진심 어린 응원도 있었지만, 어떤 때에는 애써 씩씩한 척을 하며 보내기도 했다.

첫째가 가족의 품을 떠나 독립 연습을 한 것은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용인한국외국어대학교부설고등학교(용인외고) 여름 캠프에 3초 컷 선착순에 들면서 아이는 처음으로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독립 가능성을 알렸다. 다행히 사춘기가 시작되어 힘들어하던 아이에게 낯설게 보낸 3주는 값진 시간이 되었다. 아이는 치열하게 자신의 역량을 점검했고, 미래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들려주었다. 감사하게도 그 결실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세상은 넓으니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말자.


이제 사춘기의 방황은 사그라들었지만,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다시 고민이 깊어진 아이가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더니 어렸을 때부터 쓰던 '나 기록장'에 이런 결심을 적어두었다. 나도 열여섯 살에 이런 생각을 했던가.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다짐을 동생에게 나누며 지혜를 전했던가. 아이의 글씨를 본 순간, '적어도 나보다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겠구나.'라는 안심이 들었다.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고, 성숙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리라는 확신, 그 믿음이 끝을 알 수 없는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중간 정산의 기쁨으로 돌아왔다.


지난 5월에는 둘째에게도 가족의 품을 떠나 세상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작년 가을, 교황청 전교기구 한국지부에서는 교황님을 만나는 <꿈나무 캠프>를 모집했다. 준비 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선종하셔서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아무리 말려도 가고 싶다는 뜻을 굽히지 않은 아이는 출국을 앞두고 레오 14세 새 교황님의 선출로 큰 선물을 받았다. 막상 로마에 가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성지 순례의 선물 상자 안에는 교황님의 첫 일반 알현 때 교황님을 아주 가까이서 뵙는 영광과 유홍식 라자로 추기경님께서 한국어로 집전해 주신 성 베드로 성당에서 미사 봉헌 외에도 교황님의 즉위 미사로 오신 주교회 의장 주교님 등 여러 훌륭한 신부님들께서 미사와 강론, 젤라토 선물 등이 들어있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첫 일반 알현, 이 사진 안에 우리 스테파노가 있다 (출처: 바티칸미디어)


캠프를 마치고 인천 공항에서 만나 김포 공항을 거쳐 다시 제주공항으로 오던 밤, 아이는 9일 동안 보고 느끼고 배운 것을 나눠주었다. 열두 살 아이가 들려준 첫 소감은 감동이었다.


나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


로마에 도착한 둘째 날부터 핸드폰이 고장 나는 바람에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아이는 말 그대도 '독립 캠프'를 한 모양이다.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등의 자신이 할 수 있는 도움을 나누며 자신이 닮고 싶은 참 어른의 모습을 그려왔다. 더 깨달은 게 있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아직 알 수는 없다며 '열심히 살다 보며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지 않을까?'라고 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선물은 사람인 것 같다. 그중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속삭이며 아이들을 깨우는 우리의 아침 풍경이 말해주듯 우주를 품은 것 같았던 두 아이와의 만남은 가장 큰 축복이다.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있고, 아이들이 지닌 마음을 세상에 내놓을 생각을 하니 엄마로서 안심이 된다. 요즘은 사람과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나 내 입장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는 친구와 가족들이 있다는 것, 내 삶이 흔들려도 계속되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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