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가을
가을의 풍성함은 한 개체의 종말을 그리고 그 종의 영원을 위한 최후의 몸짓같아서 슬픈, 아름다운,풍성한 가을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세상은 한 개체의 삶을 영위하는것에 관계없이 그것을 이어가는것으로 유지되고 있고 그래서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계절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풀벌레 소리가 아름다우면서도 유난히 슬프기도 했던 어제 저녁 산책.
내년이맘때도 난 이꽃을 이소리와 바람을 느끼겠지만
그게 “바로 너”는 아니란걸
난 슬퍼하지 않을거고
이미 세상에 없는 너도 슬퍼할 수 없고
그렇지만 네가 지나간 그 흔적에 자손이 있고 예의 세상이 유지되어가고 있으니
너는 아직 세상에 있는것이지.
세상을 완벽하게 인식할수도 없으면서
영원한 삶을 꿈꾸는 그런 어리석은 헛된 희망을 품으면서 살아가는것이지.
아마도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이 한계에 부딪혀 삶을 끝내는 유일하게 할수있는
삶의 결정적 결정을 한게 아닐까 이해하는 요즘이다.
이번주에 발달이 늦은 아이를 데려온 엄마가.
지난 영유아 검사를 스킵한 이유를 이야기하면서
“저한테는 의미있는검사가 아니었으니까요” 라고 힘없게 던진 그 한마디가 가슴에 깊이 멤돈다.
내가 너를 사랑해도, 넌 정상일수 없고
정상의 경계란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해도
세상은 널 정상으로 받아주지 않아
난 널 정상으로 아니 적응하도록 하려면
이 슬픔을 감추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작은,아주 작은 그 아이를 안고 뒤돌아서는 그 엄마의 어깨가 내게 말하는것같았다.
슬픔이 몰려온 이후엔 그것이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과 함께하는 것에 익숙해지는것일뿐.
감사는 순응이라는 패배를 단지 좋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것 아닌가 싶다.
저 꽃은 매우 아름다운데, 갸날푼 몸짓이 매우 슬퍼 보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