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때 소설을 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내용은 일제강점기, 형 대신 일본 강제노동에 자원해 간 동생의 사연과 일본인으로서 한 조선인 위안부를 돕게된 청년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정성스레 원고지에 써내려간 시놉을 국어선생님께 보여드렸는데, 선생님은 고개를 갸우뚱 하시며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하셨다. 고작 중학교 2학년이 뭘 알았겠냐마는, 아마도 그것은,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있는 인간애 같은것이 아니었을까.
가족이 있는 형 대신에 형이름으로 죽었던 동생의 사연이나,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나라에 반대해 조선인 여성을 구하고 돕는 이야기는 지금은 찾기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극한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실리를 포기하고, 심지어 그것이 자신의 목숨일지라도, 혹은 목숨과 같은 것일 지라도.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역사가 되어있다.
군국주의나 제국주의 혹은 국가주의 같은 어려운 단어를 모르고, 그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 아직 이해하기도 전인 중학교 2학년도, 어쩌면 사람의 마음속엔 선하게 살고 싶은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나보다.
사회나 시대는 사람의 마음을 빚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내가 자라는 동안에 나를 만들고, 그 생각이 자연스럽게 베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전에 눈빛으로, 손짓으로, 생활로 몸에 벤다. 그것이 집단의식, 혹은 문화자본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휩쓸리듯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무 비판이 없다면 그것은 무서운 무기가 혹은 무거운 족쇄가 된다.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던 예루살렘으로 무작정 쫓아간 한나 아렌트는, 무엇을 기대하고 그곳에 있었을까.
한나 아렌트는 작고, 초라하고 그러나 당당하고 여전히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한 아이히만을 만났다. 깊은 절망에서였을까, 그는 그의 초라함을 평범함으로 설명하였다. 우리가 비판없이 받아들인다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악하게 만들수도 있다. 악은 이렇게나 평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민으로서 살아가고자 한다면 생각하고 비판하고 다시 보아야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한바 아렌트는 우리에게 이렇게 역설한다.
평범하지 않다면 어떨까. 케이트 윈슬릿 주연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영화에서,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하는 나찌의 말단 간부로, 전쟁이 끝난후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에 그녀의 첫사랑인 마이클이 법대생으로 그녀의 재판에 참관하게 되고, 그는 그녀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재판에서 알아가게 된다. 그녀가 문맹이라는 것만 밝히면 무죄가 될수 도 있었지만, 그녀는 끝내 밝히지 않았고 감옥에서 형을 산다.
오랜시간이 흐른뒤 여전히 형을 살고 있는 한나에게 마이클이 긴 형을 사는동안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느냐고 묻자, 한나는 내 생각이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답을 한다.
한나 아렌트는 우리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생각하지 않는다면 악에 빠질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늘 비판하고, 깨어있어야한다. 영화는 더 깊이 이야기한다. 글을 읽지 못해, 아무것도 몰랐더라도, 거기에 있었다면 잘못이다.
개인의 사연과 감정이 더 부각되는 요즘,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살아갈 기회들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졌을텐데, 그 행동의 무게이전에, 한 걸음 한 걸음에 모두 우리의 선택의 결과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된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그 갈래는 단 한번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에겐 선하게 살아갈 기회가 매번 매순간 열려있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