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본질과환상
영화 파묘
제목부터 파격이다. 거기다 푸르고 검은 색상이 주조를 이루는 사진과 영상, 본래 무속의 빛깔은 오방색을 갖춘 화려함이었다. 여기에서 감독의 컬러 선택부터 전략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소재에다 의도된 단순함은 상상력을 요구할 것 같지만, 이 작품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의 상상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화면을 주목하는 눈빛과 주연들의 눈빛은 닮아 있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인공지능 AI 시대에 무속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작품의 분위기는 이 둘이 서로 통할 것 같이 절묘하게 배합해 놓는다. 흥행의 비결을 익힌 감독만이 가질 수 있는 감수성과 전략이다. 단순성이 주는 매력은 누구나 지닌 본능이자 감각의 원형이다. 여기에는 첨단의 디지털 문명과 무속이 함께 어울릴 수가 있는 공간이 있음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세계는 감각적으로도 단순하다.
그러나 이 원형적 기제는 우리의 잠들었던 의식을 깨운다. 먼 기억을 소환해 새로운 느낌으로 만나게 한다. 이것은 기술이면서도 예술까지 갈 수가 있는 세계다. 그는 이것을 이룰 것인가?
거액의 돈, 풍수, 음양과 오행 원리, 무당, 죽음과 묘자리 그리고 굿판과, 악몽을 꾸는 어린 생명, 이 의도적 설정은 이 장르에 익숙한 장인의 기본기에 속할 것이다. 여기에 일본 무속신과 쇠말뚝과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의 등장은 임란과 일제의 악몽을 떠올리게 해 긴장감을 이끄는 시공간을 연출한다. 그런데 일본 무장의 호기로운 음성과 탁한 음색은 너무 과장한 것인가?
영화의 극적인 전개는 악령이 깃든 관짝을 태우고 젖은 나무 몽둥이(木)로 녹슨 일본도(金)를 꺾는 것으로, 무속 신앙을 앞세워 박진감 넘치게 구성한 '한일전'은 결말을 맺는다. 마침내 한국인의 잠재된 본능을 자극해 일깨우는 데 성공한다. 이 오래된 '해원解怨'의 숙제는 오늘의 상황을 보면 시대가 바뀌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영화처럼 굿판을 벌려 화장을 하고, 젖은 나무 몽둥이로 녹슨 일본도를 깨는 것으로 끝이 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보면, 감독은 차기 작을 준비할 것 같다.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오래고 질긴 이야기는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 것인가?
P.S.
우리는 현상 속에서 본질을 보려 하지만, 현상은 또 다른 현상에 가리어 본질은 늘 미궁 속에 갇히기 일쑤다. 한국인의 전통문화는 본질인 '도道'를 구하려는 열정이 가득하다. 그것이 너무 치열하다 보니 거기에 매몰된 경우가 많았다. 이 모두는 현상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부림이었다.
동이족이 세운 상나라 역사는 무속의 '신명'에만 의지해서는 결코 본질인 도道를 얻지 못함을 말한다. 순수한 신명이 가지는 힘은 절반의 진리를 향할 뿐이다. 500년 철학의 왕국 조선 성리학의 추구는 완전한 진리였으나, 동북아의 지정학 구조에 갇혀 끝내 진리를 이루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나머지인 반쪽을 이룬 사대부 선비들의 성과라기도 하고 패배라고도 말한다.
우리 한민족의 전통문화는 그래서 완전한 진리를 두고 애타게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한恨'을 가진다. 완전한 전체에 대한 끝나지 않은 그리움, 그 단련의 성과가 '한류'로 나타난 것이다.
'파묘'라는 작품의 고심 어린 구성과 그 감상평들을 보면서 우리 전통 무속 신앙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본질과 진실을 향한 그들의 갈망과 치열함을 볼 수가 있다.
완전한 진리를 향한 오랜 발원의 현장이다. 이것은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신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는 나머지 절반인 과학과 합리를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합리의 세계는 본래 서구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 졌던 '도道'의 일부였다. 신명과 과학은 자연 원리로서 하나이다.
우리는 신명에 의지하여 과학을 한恨으로 품고 그리워했던 것이다. 우리를 그 자리에 너무 오래도록 머물게 했다. 한恨의 실체는 완전함과 전체에 대한 그리움이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약속의 땅은 완전한 진리의 세계다. 신명과 합리와 과학이 함께하는 전체이다. 우리는 지금 거기로 가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