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고양이, 길 고양이. 길 위의 그들은 홀로 남았지만 두 명사 간의 나란한 수식으로 명명된다. 여기 한 고양이가 있다. 좁은 집의 더 좁은 곳, 어두운 방의 더 어두운 곳에서 두 팔을 모으고 웅크린 채, 소위 말하듯 식빵을 굽는.
그녀는 아스팔트 위에서 태어났지만 마른 방바닥 위에서 걸음마를 떼었다. 사람의 언어로 격려받고, 제 몸보다 낮은 체온의 손바닥 아래서 사랑받는다.
계절에 상응하는 적절한 실내 온도와 환경. 언제나 가득 담긴 사료 그릇과 필요할 때마다 목을 축일 수 있는 물병, 때가 되면 쾌적해지는 모래. 환기를 위해 열어 두는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그녀에게서는 이제 경계와 야생성은 찾아볼 수 없다. 종종 놀이용 낚싯대를 흔들어 주면 미비한 본능만이 털끝에 맺혀 커다란 동공으로 엉덩이를 씰룩댈 뿐이다.
마음 간의 교집합은 날을 거듭할수록 면적을 넓혀가지만, 그럴수록 이종 간의 어쩔 수 없는 간극들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식사 자리에서 수저를 드는 사람과 오른손을 닦는 사람처럼 극명한 차이를 체감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목울대를 꿀렁이며 토하던 밤에는 마음을 졸이다, 그것이 그루밍 탓에 삼킨 털들을 토하는 '헤어볼'이라는 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형 낚싯대를 쫓으며 신나게 달리던 날은 입을 열어 호흡하는 것을 보고 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가 일시적인 흥분 작용이라는 말에 안심하고는 했다.
나는 그녀와의 동거를 통해 각자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관계가 고양이와의 동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각자의 세상에서 살던 우리는 같은 발음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전하기도 하고, 다른 행동으로 같은 것들을 표현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는 0 개 국어를 사용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보고 싶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다른 발음으로 전하는 하나의 애정이라는 것. 연락하지 마! 호기롭게 외친 말과는 다르게 그 사람의 대화창에 수십 번씩 들락거렸던 밤. 누군가는 부재로 존재를 증명하듯 난 자리의 허전함으로 뚜렷했고, 또 누군가는 존재로 부재를 증명하듯 함께일 때 짙게 외로웠다.
어느 날은 그녀의 꾹꾹이 몇 번에 옷 위로 뜯긴 자국이 선명했다. 부모에게 꾹꾹이 하나 배울 새 없던 처지에, 손톱을 감추어야 한다는 걸 알았을 리도 만무하니 그대로 두기로 한다.
목을 긁으며 옷자락을 쥐었다 펴는 손짓은 저들의 언어로 사랑이란다. 동음으로 충족된 적 없는 사랑을 서툴게 퍼붓는 이 손길을 미워할 수 있을까. 긁힌 살갗과 뜯어진 천을 상처라 말할 수 있을까. 지금 그녀는 서툴지만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말한다.
내 언어가 이처럼 서툴던 때도 분명히 존재할 테다. 넘치는 감정을 퍼붓는 동안 누구에게는 해진 흉터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라 부르던 그 행위에 두어 방울 맺힌 핏방울쯤은 눈 감아 주던 피부가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모든 언어는 처음이라는 합리화와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누군가의 너그러움을 종용하며 실밥을 뜯어냈겠다. 결국 모두 서툰 꾹꾹이로 해진 웃옷 한 겹쯤은 걸어 두고 살겠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사랑이라 불러 주던 사람이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