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막고 고개를 숙이는 객실. 기차는 그저 승차와 하차일 뿐이다. 두터운 가림막으로 창을 가리고, 손바닥 위의 세상에 몰입한다. 온갖 흥미들이 엄지 아래 무한대로의 줄을 세운다. 나라고 다를 것도 없다.
어김없이 고개를 숙인 채로 탑승한 기차였다. 보조 배터리가 고장 난 줄도 모르고 충전되지 않은 핸드폰을 잘도 혹사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경고 메시지가 뜨고서야 케이블을 연결해 보고는 충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필이면 콘센트가 없는 자리라 당장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하차 후에 기다리고 있을 친구와 연락하려면 이 간당간당한 배터리라도 아껴 둬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가방 속에 밀어 넣고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인스타그램에서 추방을 당하고서야 담백한 소리들이 귀에 들어왔다. 엄마, 저게 뭐야? 응, 저건 산이야. 엄마, 저게 뭐야? 응, 저건 밭이야. 밭이 뭐야?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맑은 목소리는 각진 객실 속 유일한 곡선이었다. 그 물음표를 타고 미끄러지듯 고개를 돌리면 그제야 창밖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짙게 익은 밭과 좁은 흙길, 노을이 내려앉은 강 위를 태연히 머물다 가는 철새들. 밭 위를 오가는 농기구와 그 사이로 달리는 자전거 한 대. 까만 터널을 지나 장면이 바뀌면, 이번에는 다리 아래로 길게 뻗은 산책로가 보인다.
출발지와 목적지 사이의 낯선 풍경, 일면식 없는 곳들이 애틋하다. 마셔 본 적 없는 공기와 느껴 본 적도 없는 끈적한 습기. 엄지 손가락 아래에는 없던 추억이 이어진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그리움을 허락도 없이 훔쳐 달렸다.
이 그리움이 앞좌석 노부부의 것이라면. 흙길 위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당신은 하얀 민소매와 반바지 차림이었을까. 제 또래 남학생들과 모여 저쪽 강에 벌거벗고 뛰어들었을까. 아, 그녀는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막내 동생이 있을지도 몰라. 그 동생의 손을 잡고 흙길 위를 걷던 저녁이 있었겠지.
기차에는 닿아 본 적 없는 시절이 있다. 기차를 타고 달리는 건 누군가의 추억을 통과하며, 내 것이 아닌 향수를 훔치는 일이었다. 질척한 흙내가 가득한 그리움을. 누구의 것인지 몰라 돌려줄 수도 없는 추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