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필사적으로 아이다움을 흉내 낸다. 이제부터 들리는 것을 듣지 않아야 한다. 좋아하지도 않는 만화 영화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적절한 타이밍에 킬킬… 장난스러운 웃음까지 흘려 주어야 한다. 바닥에 엎어진 주인공을 보고 있자면 왈칵 눈물이 날 것처럼 슬펐지만 손뼉 치며 대소해야만 한다.
그렇게 범람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막아선다. 아이는 많은 것을 몰라야만 했다. 순진하고 천진하게. 아이가 아이답지 못한 것은 반드시 누군가를 슬프게 한다.
아이다운 아이는 낙인의 부당함을 몰라야 했다. 그것에 맞서려면 그동안의 천진함을 모두 부정해야 하니까. 아이는 침묵한다. 단지 웃는다. 킬킬. 이번에도 아이는 슬픈 장면에서 짓궂게 웃었다.
아이의 눈물은 반드시 단면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 커다란 소리에 놀랐을 때, 꽈당 넘어져 아팠을 때. 귀를 막는 데 실패해 눈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면 차라리 크게 울어야 한다. 울음과 동시하는 침묵은 그간의 역할극을 전부 발가벗겨 버릴 테다.
왜 울었어?
엄마가 울어서…….
그래서 슬펐어?
그냥 엄마가 우니까 따라 눈물이 나왔어.
그리고 또 킬킬 웃는다. 넘어가지도 않는 밥을 씩씩하게 욱여넣는다. 밥알이 모래 같아, 같은 말은 아이답지 않다. 빳빳한 소시지와 끈적하게 졸인 땅콩만을 골라 짚으며.
그런 것 말고 이런 것도 좀 먹어야지. 고소하게 무친 나물을 밥 위에 얹어 주는 능숙한 쇠젓가락질에 괜히 투정해야만 한다. 어차피 뭘 씹어도 전부 고무 같아, 같은 말은 모래와 함께 삼키고.
이 역할극을 당신은 영영 몰라야만 한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지 않는 순진함을 연기하던 그 아이를 몰라야만 한다. 빠진 앞니로 모래를 씹던 아이를. 격양된 어른들의 단어를 홀로 깨우친 아이를. 언어와 언어 사이 그 발열을 읽던 아이를. 여전히 슬플 때면 킬킬… 웃는 나의 열연을 끝까지 몰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