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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은 May 19. 2024

아주 실속 없기


 입원한 그녀를 만나러 가기에 앞서 필요할 것들을 검색해 본다. 청력에 좋은 음식, 돌발성 난청에 좋은 음식, 마그네슘 비타민······. 청력과 난청에는 견과류가 좋다고 한다. 마그네슘 비타민은 좋은 건강 보조제지만 체질에 따라 몸에 맞지 않을 수 있으니 복용 전 약사와의 상담을 요한다고. 한동안은 저염, 고단백 위주의 식단을 고수해야 한다던 그녀의 한탄을 떠올리며 소포장된 견과류를 구매하기로 했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숙면이라고 하니 온열 안대도 함께 담아 본다.


 병원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를 잡으려다 등을 돌려 층별 안내도를 살폈다. 불현듯 아주 실속 없는 것을 선물하고 싶어졌다. 나는 이렇게 자주 경로를 이탈해 버린다. 다른 정보는 더 검색해 보지 않고 간단히 약도만 둘러본 후 7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필요에 의지한 선물들은 정보에 따라 승패가 갈리지만 무용하기로 했다면 단지 수고와 감각에 맡겨 보는 게 좋다. 시선을 옮기게 하는 건 어차피 애정일 테니까.


 7 층에서 약도를 대여섯 번은 되짚고 나서야 찾던 곳이 영업을 종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매장은 저번 달까지만 영업하다 빠지고 지금은 인테리어 소품 매장으로 바뀌었어요. 층별 안내도에 아직 수정이 안 됐나 보네······. "여기 다른 꽃집은 더 없나요?" "없어요. 화분이 필요하신 거라면 저쪽 소품 매장에서 조화 화분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급한 대로 택시에 올라 검색 엔진의 힘을 빌려 보기로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 정도 찬스는 허용해 줘야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꽃집이 걸어서 십오 분,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도 딱 십오 분. 와중에 이 친절한 오지라퍼는 묻지 않은 정보까지 툭 흘려 준다. <꽃은 알레르기 위험이 있어 대부분의 병동이 반입을 금지합니다.>



 결국 그녀에게는 견과류와 온열 안대만 들려 주었다. 견과류가 청력 회복에 좋대. 그리고 이건 온열 안대. 꿀잠 자라고. 잠이 보약이라잖아. 야, 근데 나 처방약 때문에 매일 기절해. 눈 뜨면 일곱 시라고 아침밥을 가져다준다니까. 그 맛이라고는 느껴지는 게 없다는 밥? 그래, 그 나무껍질 씹는 맛.


 맞다, 청력에 마늘이 좋대. 커피가 안 좋대. 잠을 푹 자야 한대. 마른 사람이 고위험군이래. 우리는 농담으로 헛디디다가도 자꾸 다시 필요를 언급했다. 나는 원래 일부러도 접질려대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자꾸 바로 섰다. 하필 손에 들린 게 온통 필요라서일까. 가까운 곳에서 꽃집만 찾을 수 있었더라면 들리지 않는 불편과 무미한 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와 함께 듣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을 텐데. 잠시라도 필요의 피로를 벗어던질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우리에게도 실속이 유행하게 된 걸까. 좋아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족되던 실용이 조금 더 촘촘해질 나이가 된 걸까.

 언제부터인가 무엇인가 선물할 때면 필요와 실용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분명 필요로만 설명되는 것들은 금방 입을 마르게 할 뿐이었는데. 그건 시시한 것이었는데. 뭐 하러 샀어. 필요도 없는 것 처치 곤란이기만 하지. 돈 아깝게. 실용에 위배되는 선물은 보통 이런 식의 혹평으로 감산된 탓인지, 개중에서도 꽃이라면 유달리 거창한 핑계가 필요했다. 그마저도 어느 정도 무르익은 관계에서는 유난이 되는 모양이지만.


 내 손에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 꽃다발이 들린다. 내가 여전히 엇나갈 수 있는 건 그 한 다발 덕분일지도 모른다. 딸의 생일을 꽃으로 축하하는, 가볍게라도 축하할 일이 생기면 당연하다는 듯 꽃다발부터 손에 들고 다음을 계획하는 고슴도치 부부의 사랑 덕일지도. 뒷좌석에서 홀로 꽃다발을 만들어 왔다는 남자와 홀랑 연애를 결심해 버리는 것도 전부 말이다.

 감촉을 잊지 않도록 매년 손에 들리는 포장지의 부스럭거림과 실속 없음에 환호하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여전히 자주 꽃집에 쳐들어갔고, 불쑥불쑥 잘도 내밀어댔다.



 "잘 가, 김예은이······. 가지 마, 김예은이······." 그녀의 수액 홀대에 걸린 유용한 종이가방이 흔들린다. 쓸모로 구멍 난 손등과 유용으로 채워졌을 위장을 떠올린다. 실속 차리지 말걸. 유행에 지지 말걸. 역시 꽃을 사 왔어야 했는데. 그냥 조금 늦는다고 말할걸. 알레르기가 있는 환자가 있을 수도 있다니까 들고 한 바퀴만 돌자고 말할걸. 견과류나 커피, 체질, 숙면 같은 건 종이가방에만 넣어 줄걸. 잠깐 유용하고 쭉 무용할걸.



 너무 많은 필요를 검색했을 때부터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성공적으로 헛디디려면 검색 엔진은 오로지 위치 파악 용도로 충분하다. 결심만으로 무작정 생화 매장을 마주칠 수 있다면 좋을 테지만.

 미지의 설렘을 간직한 채로 매장에 들어가 선물하고 싶은 꽃을 고르기. 필요하지 않기로 정한 이상 꽃말도, 의미도 없다. 오로지 선물하고 싶어서 혹은 네가 좋아하는 꽃이니까로만 포장한 채로 덜컥 안겨 줘 버리기. 살풋 떠오르는 홍조에서 지켜낸 무용을 음미하기. 그것을 낭만이라 부르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자꾸자꾸 무용해지고 싶다. 아주 실속 없고 싶다. 같이 헛디디고 엇나가고 싶다. 아무 쓸모로도 설명되지 않고 싶다. 필요 없다는 이유로 잊고 살 때쯤 불쑥 확인시켜 주고 싶다. 실용에는 박식하고 무용에는 둔감해지는 그들에게 자꾸만 무쓸모를 쥐여 주고 싶다. 실용은 살아 있게 하지만 무용은 살아가게 하니까. 쓸데없는 농담을 하고 실속 없는 선물을 자꾸자꾸 떠안겨 주며.

 책장 위에 놓인 푸른 장미가 말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나의 이런 실속 없음은 태초부터 뿌리내려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음 계획에 필요한 것이라면 그녀의 퇴원 날짜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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