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영어유치원 금지법'을 발의한다고 하니 드는 아무 생각
#1
예전에 '초등 의대반'이라는 단어를 보고 진짜 속이 뒤틀리고 역겨운 기분을 느꼈다. 물론 사람들이 다 비난하는 문제이고 나도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로서 기분 나쁜 이유가 좀 더 복잡했다.
① 결국 학원이 돈을 벌기 위한 상술이고 돈도 의대나 의사가 받는 것도 아닌데, 댓글은 기승전결 또 의사를 욕하곤 했다. 그건 마치 멀쩡히 지나가다가 뺨 맞는 더러운 기분이었다. 의대 가본 적도 없으면서 의사만 되면 인생 만사 오케이 될 것처럼 홍보하는 학원도 오늘 날 의료 대란의 원흉 중 하나 아닌가. 솔직히 의사 팔이 하는 학원이 의사보다 돈을 더 많이 벌 거다. 게다가 학원은 학생 성적 못 올렸다고 질타받거나 소송 걸리지도 않는데 말이지. 진짜 생각해 보니 억울하네. 앞으로 학원은 '의대'라고 내걸 거면 의사에게 위자료라도 줘라.
② '초등 의대반'에 의사 부모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찐 부자는 (사람들이 시기해야 할 진짜들... 의사 따위 가짜 허수아비 말고) 그딴 거 안 해도 그냥 해외 의대 개구멍을 통해 의사 시키더라. 그런 부정, 불합리는 신기하게 입 꾹 닫으면서, 정작 그걸 비판하는 의대생들을 욕하는 여론을 보며 말로 형용하기 힘든 착잡함을 느낀다.
③ 의대고 나발이고 사교육은 한국 노예들이 이만큼이나 처절하게 아등바등 살고 있다는 방증이다. 높으신 분들이 얼마나 우아하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이번 '교육부' 장관 후보가 자식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봐라. 사람들이 그걸 못 해서 '초등 의대반' 같은 불량식품이라도 먹는 건 생각 안 하겠지?
근데 요즘은 '4세 고시'라는 끔찍한 것마저 나왔다고 한다. 5세에 가는 유아 영어학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4세에 준비한다는 거다. 즉 대학 입시에 유리하려고 하는 선행학습이 중학교, 초등학교로 내려왔는데, 그걸 가르치는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또 준비하다 보니 나이가 자꾸 내려가는 것이다. 어리석지만, 어쩌면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예상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결국 의대/의사를 망가뜨려서 이 탑을 전부 무너뜨리자는 거겠지? 의료 시스템까지 붕괴시키면서? 역시 '악마'로 규정되어 망해야 하는 운명이로구나... 의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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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생각까지 이어지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2
나름 이과 수험생의 정점 '언저리'는 올라가 봤다고 말할 수 있는 아빠로서 자녀에게 주고 싶은 능력은 '영어'이다. 나는 무려 알파벳을 초등학교 4학년에 방과 후 교실에서 배웠으며, 유학이라곤 해본 적 없고 수능/토익 영어만 공부한 사람이다. 약간 답답해도 원서는 읽는데, 듣는 거나 말하는 건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서 진료실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데 사실 큰 문제는 없다. 아쉬운 사람이 의사가 아니므로. (아니 우리도 외국 병원에 가서 진료하면 의사가 한국어를 안 해줄 거잖아? 근데 외국인 얘네들은 한국에서 진료받으면서 의사가 당연하게 영어를 해주길 바란다니까?) 근데 해외여행이나 학회에 가면 영어 못하는 게 너무나 큰 아쉬움이 되더라.
돈 있는 집안이면 모양 빠지게 유아 영어학원이 뭐야. 그냥 외국 가서 잠깐 살다 오면 되지. 근데 우린 그게 안 되잖아? 그러니 유아 영어학원이라도 보내면 native speaker까진 못 되어도 pseudo-native speaker는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꼭 입시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말이다.
물론 나도 아이가 어릴 땐 노는 게 배우는 거고 남는 거라고 생각하며, 인성 어쩌고가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아니까 (그래! 그놈의 인성 타령에 관한 얘기도 나중에 좀 해보자) '4세 고시' 같은 미친 짓은 절대 안 시킬 거다. 그러나 영어는 진짜 살면서 두고두고 아쉽긴 하더라.
그래 맞아... 결국 아빠 자신이 아쉬워서 그래. 영어를 못해서 '한국 홍위병'들이 의사를 모욕하고 유린할 때 남들처럼 해외 탈출을 못 했어... 언어가 안 통하니 떠날 엄두가 안 나더라. 그런데, 이렇게 아빠가 주저해서 아이가 더 큰 세상으로 나갈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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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까지 이어지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3
아니 근데 진짜 심각한 문제이긴 해서 36개월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영어 등 교과 관련 교습 행위를 법으로 전면 금지하긴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국의 특수한 역사와 환경,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법으로 틀어막기만 하는 게 과연 올바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냐는 건 다소 의문이다. 전두환 대통령 때 '과외 금지' 법이 있었는데, 왜 실패했는지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4
아무튼 영어는... 아빠야말로 공부해야 할 거다. 아이는 옆에서 책 보는 시늉이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