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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게임에 대한 생각 몇 가지

게임 그렇게 많이 해도 의대 잘만 가더라

by 남산

#1
아이와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에 '게임 같이 하기'가 있다. 물론 보드 게임 같은 것도 포함이지만, 정확하게는 '비디오 게임'을 말한다. 더 세밀하게는 1990년대에 나왔던 전설적인 게임기 닌텐도 슈퍼 패미컴의 게임들을 같이 하고 싶다.

내가 게임을 접한 건 PC(286?)와 패미컴(1989~)부터였지만, 어린 시절 추억의 정점을 찍었던 게임기는 슈퍼 패미컴이다. 그 시대의 역사이자 문화가 담긴 그 게임기. 그걸 현역으로 즐겼다는 것이 뿌듯할 정도이다.

슈퍼 패미컴이 은퇴할 무렵 '스타크래프트'라는 전설이 나와 다들 그 게임만 했지만, 아쉽게도 난 그 게임은 잘 맞지 않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좀 더 복잡한 문제였다. 그 시기엔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와 PC방에 간다는 것 자체가 내적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나답지 않은 연기'였다. 블리자드의 전작들도 해봤고 스타크래프트를 알파 데모 때부터 알고 있어서 먼저 해봤음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었던 '취향 문제'도 컸다. 마침 입시에 돌입할 시기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이 겹쳐 자연스럽게 게임에서 멀어졌...을리가 없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에뮬레이터'라는 것이 내려왔다! 슈퍼 패미컴 게임들을 PC에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불법 복제의 문제가 있었지만, 얼마나 달콤한 유혹인지 안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100% 재현을 못해 소리도 안 나오고 그래픽도 뭔가 나사 빠진 느낌이 많이 들었지만, 아무튼 플레이가 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러더니 급속하게 발전하여 거의 완벽에 가깝게 재현하게 되더라. 그걸로 난 이미 다 즐겼던 게임도 다시 깨고, 몰랐던 명작 게임도 샅샅이 긁어모아 빠짐없이 다 즐겼다. 진짜 이런 명작도 다 있었구나 대단하다...라고.

수험생 때 푹 빠졌던 건 '파이널판타지 6'였는데, 슈퍼 패미컴의 황혼기 쯤 나온 명작으로 진짜 당대의 모든 게임 제작 노하우를 갈아 넣은 장인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게 비공식 한글화까지 되어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감동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게 고등학생 때였다. 물론 어머니께서 걱정을 많이 했고 싸우기도 했는데, 그러고도 공부할 건 다 했다.

#2
내가 의대 가면 거기서 가장 게임 오타쿠일 거로 생각했고, 샌님들만 있는 곳에서 내가 짱(?) 먹을 줄 알았다. '감히 의대생들이 '성검전설, 크로노 트리거 등등'을 알까?'같은 이상한 자부심 같은 상상을 하며. 그런데 어랍쇼? 세상엔 더 괴수들이 많더라.

고등학생 때 수학올림피아드였나? 상위 랭커였다고 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거 아는가? 그 세계도 스포츠처럼 상위 랭커는 얼굴도 알려져서 그가 시험장에 등장하면 수학 좀 한다 하는 학생들끼리 웅성웅성하곤 했었단다 (난 쩌리라서 그런 문화가 있었던 것도 몰랐음). 근데 그 친구가 모 유명 MMORPG의 상위 랭커여서 온라인에서도 유명했다고 하는 것이다. 거의 게임 중독처럼 했다고... 얘기를 들으니 나 같은 건 어디 가서 게임 좀 했다고 명함도 못 내밀겠네 싶더라.

내가 과외 할 시기엔 학생들 사이에 '닌텐도 DS'라는 게 유행했다. 닌텐도 DS 게임 공략을 꾸준하게 올리던 모 블로거가 있었는데 (유명한지는 잘 모름), 나중에 보니 게임 중독으로 치료받는 게 아니라 의대생이 되어 있더라. 지금은 의사가 되었겠지?

#3
그래서 난 아이가 게임하는 걸 죄악시하진 않을 거고, 오히려 같이 즐기고 싶다. 최신 게임도 같이 하고 싶고 (이제 신체가 따라가지 못해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했던 과거 명작 게임도 같이 하자고 하고 싶다. 게임도 인간이 쌓아 올린 심오한 기술 발전의 역사가 있다는 걸 체험시켜주고 싶다.


그리고 나이가 드니 알겠더라. 아빠가 아이가 함께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도 않다는 걸. 한정적인 시간에 아빠가 어릴 때 느낀 '그때 그 느낌'을 아이에게 전수하는 건 어쩌면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우린... 의외로 시간이 얼마 없다.

#4
한편, 올드 게이머가 생각해도 '게임은 전혀 문제가 없다'라곤 말하기 힘든 문제가 있긴 하여 고민이다. 그게 아내가 걱정하는 것이고 아쉽게도 나도 중독성에는 일부 동의한다. 다만, 중독성은 다른 취미생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예를 들어 낚시도 도가 지나치면...). 그런 의미에서 여러 가지 취미 중 유독 게임이 질타받는 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5

WHO에서 '게임 중독'에 질병코드를 부여해서 논란이 있었다. 벌써 몇 년 전 얘기인 데다 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도 아니어서 그냥 '그래서 뭐 어쩌라고?' 느낌의 '권고 사항'으로 보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우연히 모 유튜브를 보니 생각보다 여러 단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인 것 같더라. 육아하면서 힘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난 사는 것 자체도 너무 벅찬데, 사람들 참~ 부지런하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방에서 혼자 또는 친구 몇 놈이랑 게임하던 그때 그 시절이 너무 그립다. 아무튼 여러 추억과 생각들이 떠올라 두서없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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