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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蟹 | Crab) 종이접기의 심오함

뜬금없이 작은 성취감과 깨달음까지 얻네

by 남산

#1
어릴 적 난 다재다능은 했던 모양이나, 깊이는 얕았다. 하긴 손대는 것마다 쉽게 마스터하는 것도 뭔가 옳지 못한 것이리라. 아무튼 '오리가미'도 그랬다. 종이접기가 복잡해질수록 무슨 조각처럼 정교한 형상을 갖추게 되는데, 어린 나는 그 매력에 푹 빠졌다. 서점에 가면 종이접기 책 코너부터 가서 새로 나온 책은 없는지 살펴보는 게 루틴이었다. 그땐 인터넷도 없었기 때문에 그 세계가 또한 얼마나 심오한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오리가미'라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오리가미. 물론 '종이접기'와 동일한 단어인데, 아무래도 (오타쿠의 나라다운) 일본이 많은 연구가 되어 외국에서도 마치 보통명사 (origami)처럼 불리는 모양이다.

누가 봐도 뭔지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정사각형 종이 한 장으로, 자르지 않고 접어서만 만드는 것.

종이접기 세계도 너무나 깊고 넓어 국가 불문 각종 괴수들이 넘쳐나고,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작품들이 매우 많다.

#2
이유는 모르겠으나 (꽂히는 거에 이유가 있을까?) 언젠가 난 게를 좀 더 '잘' 접고 싶었다.

일단 게를 아주 간단하게 접으면서 개념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누군가 봤을 때 '아! 이건 게다!'라고 느낄 수 있는 게의 특징은 아마도 1쌍의 집게발과 나머지 4쌍의 다리일 것이다. 정사각형의 종이는 4개의 꼭짓점을 가지며, 종이접기에선 대개 어딘가의 말단부가 된다. 즉, 4개의 돌출부로 10개의 게 다리를 표현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자라지 않은가? 그럼 2개를 집게발에 주고 나머지 다리는 4개씩 합치면 된다. 그럼 대략 게 모양은 된다.

간단한 게 종이접기 예시 (출처는 구글 검색)

#3
그런데, 뭔가 허전하니 다리를 좀 더 많이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종이를 더 많이 접으면 된다. 일단 정사각형의 4개의 변에서도 각각 게 다리를 뽑을 수 있는데, 그래도 문제는 게 다리는 10개라는 거다. 물론 더 접으면 어찌 되기야 하겠지만, 뭔가 '아름답게' 뽑힌다는 느낌이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누군가 완벽하게 5쌍의 다리를 가진 게 만드는 방법을 창안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찾았다. 때마침 인터넷이 생겨 찾는 거 자체는 의외로 쉬웠다.

복잡한 게 종이접기 예시 (출처는 구글 검색)

근데, 5쌍의 다리를 예쁘게 뽑기 위해선 정말 '많이' 접어야 했다. 어렵기도 하거니와 일반 색종이는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더라... 그렇게 그냥 '역시 접는 방법은 있긴 하구나'하고 포기한 게 20대였나? 그리곤 종이접기 할 일은 전혀 없었다.

#4
어느 날 아이에게 종이접기를 만들어주다가 옛 생각도 나고 해서 게를 다시 도전해 봤다. 그동안 나이가 들어서인지 별 것도 아닌 거에 집착하지 말자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굉장히 즐겁게 접었다.

우선 5쌍의 다리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4쌍을 만들어 집게발에게 1쌍을 주고 다리는 6개만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데, 이 게는 사실 완벽한 좌우 대칭은 아니게 된다. 정사각형의 꼭짓점에서 온 다리를 A라고 하고 변에서 온 다리를 B라고 할 때, 실제로 접어보면 한쪽은 ABAB순으로 정렬되고 반대쪽은 BABA순으로 정렬되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아무렴 어떠랴 그냥 그런 '게'라고 하고 넘어갔더니 생각보다 결과물이 괜찮아서 뿌듯했다.

이렇게 접으면 되겠다 싶어서 만들어 본 게

#5
그러고 보니 참 이게 뭐라고 그렇게 '10개'의 다리에 집착했었는지 모르겠다. 막말로 내가 그거 접어서 어디 대회 나갈 것도 아니고 업으로 삼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자기만족인 취미 생활도 뭘 그리 빡빡하게 굴었던 거였을까.

그냥 적당히 대충 하다 보니 이 나이에 '나만의 게'도 접을 수 있게 되는구나. 그런 작은 깨달음도 얻고 있다.

어디서 뭘 보고 접은 건 아닌데, 비슷한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렵지도 않은 방법이라 비슷한 접기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뭐 어떠랴! 특허 등록할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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