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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운 Feb 17. 2022

예민한 자의 인생 복기 2.

내 엄마의 자개장

안방에는 열 두자 폭의 큰 자개장이 있었다. 

엄마는 그것을 고이고이 모셨다. 시집오기 전까지 열심히 일한 회사에서 받은 돈으로 장만한 엄마의 혼수, 그것은 엄마의 청춘이자 자부심인 듯했다.  


곱고 영롱하던 자개장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날에 큰 상처를 입었다. 나의 유년도, 엄마의 젊음도 함께.  


완전히 어둑했던 한 날 밤. 방바닥이 울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을 떴다. 자개장 끝에 엄마가 서 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보니 아버지가 엄마의 머리를 부여잡고 자개장에 사정없이 찧어 대고 있다. 몽롱함 속에서 엄마의 머리가 수도 없이 장에 박히고 있는데 아무 소리가 없다. 엄마의 한 손은 머리를 막고 한 손은 주먹을 쥐어 입을 틀어막고 있다. 긴 파마머리가 허공에서 나부끼는데 비명도 한마디 말도 없다. 고통의 소리가 나지 않으니 꿈인가 사실인가 알 수가 없다.  


다음 날에 깨어나 보니 자개장의 큰 새가 부서져 있었다. 엄마의 이마는 새 크기만큼 푸르게 부어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날부터 나는 자개장의 자개를 살금살금 뜯었다. 하지 말라고 혼이 나면 저만큼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너덜너덜해져 있던 새의 남은 꽁지를 뜯고, 오리와 꽃을 뜯었다.  


그날 이후, 몽롱한 꿈속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인 그 일은 점차 뚜렷한 사실들이 되었다. 정기적, 혹은 수시로 예기치 않는 순간에 우르르 쏟아지고 반복되었다. 머리가 자라는 만큼 그 사실들은 횟수도 잦아지고, 구체적이며 생생하게 내 안에 쌓여갔다.


아홉 살의 봄, 담벼락의 라일락 향이 진한 가운데 엄마의 머리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 채 마룻바닥에 정중앙으로 내리 꽂힌다. 눈을 질끈 감고 고통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이 아버지의 손에서 구겨지고 있다. 머리가 공처럼 다시 튀어 오르자 부러진 이가 튀어나온다. 마룻바닥은 피로 얼룩진다. 엄마의 머리채를 있는 힘껏 잡아 젖히는 아버지의 쌍심지와 마주친 내 동공조차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새끼발가락 끝까지 피가 내려가는 소리만이 윙 윙윙... 강한 진동이 뼛조각 하나하나를 저리도록 울리고, 내게 숨 한번 쉬는 소리조차 내지 말라고 한다.  


아버지는 마루에 쓰러진 엄마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끼운 채 질질 끌고 가 방바닥 이불 위에 던져 버린다. 엄마의 모습이 눌어붙은 껌 같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다. 나 또한 피의 마루에 껌처럼 붙은 채 움직이지 못한다. 언니가 마룻바닥을 기어 다니며 부러진 이를 찾아 가만가만 방문을 열고 엄마에게 다가간다.


엄마는 이불을 돌돌 말고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다. 우리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던 엄마는 돌처럼 무거운 이불을 있는 힘껏 끌어당겼을 것이다. 언니는 굴속에 겨울잠을 자려고 자리 잡은 곰에게 소곤거리듯, 살그머니 이불을 들추고 말한다.


“엄마, 내가 엄마 이를 찾았어. 내일 병원에 가서 다시 붙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열 살의 여름, 파랗고 빨간 노을이 하늘에 흩날리는 초저녁이다. 엄마가 나와 같은 반 친구 엄마와 외출 후 돌아온다. 일찍 귀가한 아버지가 문을 부수듯 박차고 뛰쳐나와 엄마를 머리채를 붙들고 잡아 흔든다.


“어머나!! 아이고 아버님 왜 이러세요! 이러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지잖아요….” 


말리는 말을 하면서도 친구의 엄마는 황급히 운전대를 잡고 부리나케 떠난다. 수치심이 내 몸 구석구석을 마구잡이로 파헤친다. 엄마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점차 내게서 멀어진다. 윙 윙윙…. 혈류의 진동은 다시 나를 울리고 가슴 한가운데가 쪼이듯 저며온다. 뜨거운 피가 내 심장을 불타게 한다. 피가 흐르는 소리가 끔찍하게 싫다. 발가락 끝까지 저리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얼음 땡 놀이를 하는 것만 같다.


이듬해, 현관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여전히 뜨거운 초가을.  불안한 시곗바늘이 밤 9시를 항해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든다. 보이지 않는 쥐가 심장을 파먹는 것 같다. 


어김이 없다. 아버지의 큰 손바닥이 번개처럼 엄마를 휘감는다. 마루 기둥 모서리에 엄마의 머리가 박힌다.  사정이 없다. 잡히는 대로 친다. 넘어지면 발로, 일어나면 손으로, 마구잡이로 엄마의 몸이 찢어지고 구겨진다. 


언니와 내가 드디어 아버지 팔을 붙들고 빌며 울기 시작한다. 우리 뒤로 엄마가 웅크린 채 무너진다. 언니와 서로 경쟁하듯 더 열심히 싹싹 빌 뿐이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이후 생각할 일이다. 쓰러져 있던 엄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어나 눈도 뜨지 못한 채 간신히 두 손을 모은다. 엄마를 부축하고 같이 빌어 본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계속 주먹을 날리고 지치지도 않는 울음이 내 심장을 계속해서 파먹는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던 열두 살의 겨울 한낮,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가 부엌 싱크대 밑에 오도카니 앉아있다. 술을 한잔도 못 하는 엄마 곁에 소주가 담긴 잔이 함께 쪼그라져 있다. 


 “엄마, 뭐 하고 있어? 왜 그러고 있어?”  


 “그냥… 살기 시어서 그에…(싫어서 그래)”    


전날 밤 입안이 터졌던 엄마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자, 언니가 얼음을 가재 수건에 싸서 엄마의 얼굴에 대어주며 분한 숨을 쌕쌕 내 쉰다. 언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날에는 으레 속옷 바람으로 내쫓겨 현관을 두드리며 울기 일쑤였지만, 그날 이후부터는 좀처럼 울지 않았다. 오히려 내쫓기는 편이 시원하다는 듯 담담하게 나가 아버지가 부를 때조차도 현관문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언니의 일기장이 ‘그 쓰레기를 언젠가는 죽여버리겠다’라는 결심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남아 있던 유년의 아픈 기억이 매년 사계절을 거치며 또렷하게 현실화되자, 자개장이 뜯기듯 행복의 날들도 내 속에서 뜯겨 나갔다. 옥색의 봉황새가 부서지듯, 뜰에서 키우던 네 마리의 토끼를 안아주고 배춧잎을 뜯어주던 기억이 떨어졌다. 어여쁜 노루 자개가 뜯기니 엄마와 자개장에 발을 올리고 누워 조잘대던 평온한 오후의 기억도 사라졌다. 소나무 밑의 평상에서 엄마와 송편을 빚으며 솔잎 가지를 꺾어서 뿌리던 일, 고추장 된장이 담뿍 담긴 장독대를 함께 반질반질 닦던 일, 난생처음 라면을 먹고 너무 매워 울자 엄마가 뜨거운 물에 풀어 호호 먹여 주던 일…. 


따습고 간질거리던 옛 기억들은 그렇게 부서져 버려진 자개 조각들처럼 고스란히 사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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