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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새로운 도약을 위해

by 나야

어둠이 깃든 아파트 놀이터에서 중학생 딸아이가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멀리뛰기 수행평가를 앞둔 밤이었다.


한데 폼이 좀 엉성해 보였다. 특히 반동을 주는 단계에서 양팔을 앞뒤로 저을 때면 흡사 어부가 그물을 끌어당기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지켜보던 나는 황급히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마터면 '어기야 디여어차~' 장단을 맞출 뻔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을 때,


아니지, 발뒤꿈치를 약간 들고 이렇~게!


보다 못한 남편이 옆에서 시범을 보였다. 개구리처럼 높이 솟구쳐 오른 그는 저만치 사뿐히 내려앉았다. 오~초등학교 육상부 출신이라더니 역시, 실력이 녹슬지 않았군.


숙달된 조교의 시범에 아이도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나, 두울, 셋~ 펄쩍! 아까보다 한결 안정된 자세였다. 다만 이번엔 착지가 문제. 중심이 뒤로 빠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안타까웠지만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학창 시절 체육시간마다 구석에 숨기 바빴던 나로서는.


무릎을 굽혀야지, 상체를 앞으로 더 숙이고!


다행히 구원투수로 나선 남편이 꼼꼼하게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확실히 처음보단 나아졌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될 듯 될 듯하면서도 익히기 어려운 종목이 멀리뛰기였다. 하긴 사람이 공중에 몸을 띄우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수행평가는 대체 누가 만들어서 이 고생을 시키냐!


급기야 나는 원망을 쏟아내며 툴툴거렸다. 운동신경 없는 엄마 입장에서 아이의 심정이라도 대변해주고 싶었다. 그래봤자 시험이 코앞이니 연습 밖엔 도리가 없었지만. 운동이나 공부나 쉬운 게 없네.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만점이 몇 cm야?


155cm. 근데 150cm만 넘어도 합격이야.


놀이터 바닥의 블록을 기준으로 세 칸을 넘어서야 합격인데, 아이는 번번이 세 번째 줄을 밟고 멈춰 섰다.




30분쯤 지났을까. 조용한 놀이터엔 발 구르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그새 아이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뛰는 폭도 점점 좁아졌다. 어린이용 시소에 걸터앉아 있던 나도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자세를 고쳐 앉던 중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멀리 내다보고 뛰어봐.

150이 아니라 180을 뛴다 생각하고

시선을 멀리,

그래야 목표를 넘을 수 있어!


순간 노란 달빛이 머리 위를 비추는 듯했다. 여전히 두 사람은 멀리뛰기 연습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 혼자 다른 세계로, 훅 건너온 느낌이었다.


그동안 발등에 떨서진 과제를 해결하기 급급해서 종종거리던 내 모습이 스쳐갔다. 무엇보다 일터에서 놓쳐버린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나는 자책하며 쪼그라 들었고 지나간 실수에 매달리다 집중력을 잃었다. 자신감이 바닥을 치면서 풀이 죽었다. 당연히 결과가 좋을 리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그랬던 내게 남편의 한 마디는 큰 용기를 주었다. 당장 이루지 못해 낑낑대던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나만의 도움닫기를 새로 시작하고픈 마음이 솟았다.




브런치의 다음 연재를 고민할 때도 그날이 달빛이 따라왔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자신 없어 들었다 놨다 하던 글쓰기지만 일단 첫걸음을 떼보기로 했다. 고루한 일상에서 나를 각성시킨 한마디를 찾아보기로. 길을 가다보면 또다른 빛을 만날테니.


망설이는 사이 여러 날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켜주신 여든다섯 분의 구독자님들, 오며 가며 라이킷을 눌러주신 작가님들께도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새 연재를 시작한다. 간직하고픈 밑줄의 대상이 가족이나 지인일 수도, 낯선 타인일 수도 있다. 그게 누구든 깊이 바라보고 감각의 안테나를 곧추세울 작정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의 힘을 믿으며.





+ 연습하는 동안 150cm 언저리에서 맴돌던 아이는 다음 날 멀리뛰기 수행평가에서 160cm를 건너뛰어 만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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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