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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금성이요?

점쟁이가 해준 말

by 나야

나의 절친은 한때 점쟁이 도사였다.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이라면 전국 어디든 찾아다녔다. 점집 투어를 마치고 후일담을 들려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나야, 내가 엊그제 만난 점쟁이가 말이야~


아마 점집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이번엔 또 얼마나 멀리 날아갔다 온 걸까. 보통 이런 날은 전화통화가 30분 이상, 길게는 1시간도 금방이었다. 나는 재미난 연속극의 다음 화를 고대하는 심정으로 침을 꼴딱 삼키며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런 추임새를 덧붙여가며.


세상에, 진짜? 그래서?


세상만사 천층만층이라더니 천기누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점쟁이의 스타일에 따라 풀어가는 방식이나 내용도 천차만별. 어떤 면에서는 병원에서 하는 X레이 판독과도 비슷해보였다. 똑같은 X레이 사진을 놓고도 의사의 해석에 따라 정확한 진단이 내려질 수도, 어이없는 오진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점쟁이의 해석은 흥미진진했지만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자주 듣다 보니 나중엔 몇 %가 들어맞을지 점쳐보자는 호기심도 일었다. 하지만 친구는 펄펄 끓는 열정으로 모든 의구심을 녹여버렸다. 용한 점집을 찾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기세였다.


돌이켜 보면 당시 그녀는 말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만 일이 꼬이고 될 듯하다 나자빠지는 상황에서 운명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지 않았을까. 절박한 순간 누구든 붙잡고 말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을 것이다. 그런 말들은 낯선 상대가 더 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점쟁이를 부득부득 찾아다녔을 거라 짐작한다.


질풍노도의 젊은 날을 거친 그녀는 어느 날 점집 투어를 졸업했다. 낯선 이에게 운명의 판독을 맡기려고 허비할 시간에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거친 파도가 몰아치던 그녀의 삶이 평온을 맞이한 듯해서 진심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한데 그 병이 내게로 올 줄이야. 과거 친구가 점집을 찾아다닐 때 드라마 보듯 관망했던 내가 삶의 고비마다 점쟁이를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친구처럼 전국 투어를 할 정도의 패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근처 가까운 점집들을 알음알음 소개받아 찾아갔다.


그중 한 곳은 깊은 산중에 위치했는데, 내비게이션도 길을 잃기 딱 좋은 위치였다. 어렵게 찾아간 그곳에서 도사는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전생이 보인다고 했다. 전생의 업보가 쌓여 현생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모니터에 나의 전생이 나타나다니. 어쩌면 저분은 전생에 스티브 잡스였을지 몰라. 뭉게뭉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전생풀이를 담은 책도 한 권 받아 나왔는데 열어본 기억은 없고, 나중엔 오간데 없이 사라졌다.


두 번째 점집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가니 높은 대나무 위에서 붉은 깃발이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점쟁이마다 모시는 신이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그분의 신은 애연가였다. 담배를 요구해서 근처 편의점에 달려가 한 보루를 사들고 가서 제상에 바쳤다.


점쟁이는 그중 하나를 뜯어 피워 물고,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그분은 나의 운명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신점을 보려니 하루하루가 눈코 뜰 새 없다고, 바쁜 일과 중에도 아이들 밥 차려주고 뒤치다꺼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맞벌이 선배의 경험담을 경청하듯 듣고 있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나야 님은 양볼에 복이 깃들었어요.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러면서 부적을 쓰면 40만 원이라고 했다. 이것도 싸게 해주는 거라고. 나는 도와주게 싶게 생긴 볼은 어떤 볼일까? 궁금해하며 부적은 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일어섰다.




전화연결도 했다. 너무 멀어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예약하고 계좌로 입금하면 약속된 시간에 연락이 왔다. 전화로 보는 건 처음이라 다소 어색하기도 했지만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그분의 점괘는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있었다. 통화 도중에 이건 좀 아닌데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래도 전화를 끊기 전에 한 가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고민이 있는데 어떻게 되겠냐고 물었다. 점쟁이는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결국 잘 될 거예요. 목소리에 금성이 있거든요.


네? 금성이요?


아뇨, 근성이 있다고요. 그래서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꺾이지 않아요.


대충 좋은 뜻인 것 같아 웃으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뒤로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 특히 목소리에 근성이 있다는 말을 한동안 곱씹어보았다.


사전을 찾아보니 '근성'은 '성취와 인내'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고집'의 부정적 의미도 같이 담고 있었다.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 좋은 점은 키우고 나쁜 점은 자제하며 살라는 뜻인가 보다. 그렇게 정리하고 마음에 새겼다. 어쩌면 그녀는 알고 있을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한 마디가 내 가슴에 금성처럼 반짝이고 있음을.


마지막으로 찾아간 점집은 전국구로 통했다. 신통하기로 입소문이 자자해 유명 연예인도 멀리서 일부러 찾아왔다는 곳. 몇 달 전 예약한 날짜가 다가오자 면접시험을 앞둔 것처럼 긴장됐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를 마주했다.


첫인사를 나누고 고개 들어 그녀의 눈을 바라본 순간, 마치 우주 저 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과연 눈동자부터 남다른 기운이 서려있구나.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시 나는 일을 그만둬야 하나 갈팡질팡 하던 시기였다. 신비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살다 보면 어느 날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건 미래의 당신이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포기하지 말라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힘겹게 버텨온 지난 시간들을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미래에 대한 예지력인지 신통력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더없이 극진한 위로로 다가왔다.


솔직히 나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만둘 형편도 아니었는데 힘들다고 말하지도 못했다. 어딜가든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속이 곪아갔다. 누군가에게 이런 고민을 터놓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내심 붙잡아주길 기다렸다. 99개의 정답을 찾아놓고도 '그래, 맞아, 잘하고 있어'라는 단 한 마디의 응원이 절실한 시기였다. 복잡하게 꼬인 속내를 한눈에 꿰뚫어본 그녀의 통찰력이 그저 놀라웠고 두고두고 감사했다.


요즘도 점집에 가고 싶어 궁둥이가 들썩거린다. 용케 참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엉킨 마음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이 50이 되면 모든 것이 평탄하고 안정될 줄 알았지만 삶은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이럴 때 불현듯 예지력 있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속으로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포기하지 말라는 그 말을 이제는 스스로에게 해주면서 묵묵히 오늘을 살아간다. 두근거림을 안고 찾아와 줄 내일의 나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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