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 관람기
영화 상영 5분 전까지 객석이 텅 비어 있었다. 맨 뒷줄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괜스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대관한 기분을 내기엔 넓은 극장 내부의 공기가 제법 썰렁했다. 공장에서 방금 출시된 새 차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의 온기가 섞이면 인위적인 이 냄새도 금방 흩어질 거라 생각했다.
광고가 끝나갈 무렵 거짓말처럼 객석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자기 자리를 찾아 앉은 사람들은 두꺼운 겉옷을 벗고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맨 뒷자리에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자체가 거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이 작품은 無스포 리뷰 챌린지가 진행 중이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일종의 비밀 결사대를 자처했다. 응원 메시지를 남기면서도 줄거리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관객들이 아무런 고정관념 없이 영화를 만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배려일 것이다.
이날 관객들이 늦게 나타난 이유도 혹시 그런 흐름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서로 무언의 약속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다가 상영 직전에 짠하고 나타나기로.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암전이 되었다. 강렬한 첫 장면에서부터 뭉클한 엔딩까지 두 시간 동안 나는 스크린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주인(주인공 이름)의 심정이 되어 같이 분노하고 화해하고 울먹였다.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날 수 없었다. 감정의 파도가 뜨겁게 출렁거렸다. 왜 사람들이 '줄거리를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마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마술사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잠시 뒤 그 안에서 장미와 색색깔 손수건이 줄줄이 나오더니 급기야 하얀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다음으로 화려한 반짝이 드레스를 입은 금발 미녀가 등장했다. 마술사는 그녀를 네모난 상자 안에 가두고 열쇠를 잠갔다. 그 위에 검은 천을 씌우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상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마치 이래도 무사할 수 있겠냐고 으름장을 놓듯이.
음악이 빨라지고 분위기가 고조되는 찰나였다. 마술사가 검은 천을 휙 걷어내자, 상자 속의 미녀가 사라졌다. 어느새 그녀는 무대 뒤에서 웃으며 나타났고,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명절연휴마다 TV에 방영되는 익숙한 장면들. 이런 종류의 마술쇼를 볼 때마다 궁금한 것은 연습량이었다. 저 마술사는 같은 동작을 대체 얼마나 연습했을까. 눈만 뜨면 모자를 돌리고 상자를 열었겠지?
모든 게 쇼라는 걸, 철저히 계산된 속임수라는 걸 알면서도 관객들은 신기해한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완벽한 눈속임이었다. 흔들림 없는 평온함은 모두를 안심시키는 필요충분 조건. 침대 광고에만 통하는 말이 아니었다.
영화에도 마술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어린 동생이 학예회에서 종이가 사라지는 마술을 시연하지만 한 끗 차이로 실패하고 만다. 실망한 관객들의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건 실패가 아니었다. 숨겨져 있던 진실의 조각이 언제든 다시 복원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였을 뿐.
우리가 어릴 때 봤던 동화책의 결말은 한결같다.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결말을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대입했을 때 그래서 그들은 불행했다고 함부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단호하게 No를 외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강력한 미덕이라고 느꼈다. 아픔을 간직한 피해자도 일상을 누리고 당당하게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충분하니까.
회복 과정이 쉽지 않음은 당연하다. 그것은 상실과 결핍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때 온전히 가능해진다. 그제야 비로소 누군가의 시시한 농담에도 웃어줄 수 있는 틈이 생긴다. 그 미세한 틈 사이로 노란 희망이 깃드는 순간이 온다. 이 또한 수많은 시간이 겹겹이 쌓인 뒤의 일이겠지만.
+연재 요일을 수요일에서 금요일로 수정하고
이틀의 유예기간을 얻었습니다.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