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서하진의 <제부도>를 읽고
정윤 작가님의 글쓰기 수업 8강 과제입니다.
- 서하진의 <제부도>를 분석해서 읽고 감상 쓰기
"엄마, 첩상이가 머꼬? 더러븐 기가?"
유년시절 첩의 딸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자란 주인공은 그 주홍글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집을 떠난다. 공장에서 악착같이 주경야독하면서 노력한 끝에 낯선 도시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직장에서 만난 무뚝뚝한 남자에게 자꾸 눈길이 간다. 가정이 있는 그가 틈틈이 허전함을 채우러 온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잘 보이고 싶어진다. 상처로 얼룩진 그녀의 눈이 젖어가던 어느 날, 그가 여행을 제안한다. 하루 두 번 물길이 열리는 섬이 있다고. 속절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 제부도에서 그는 차를 몰고 물속으로 사라진다. 홀로 남겨진 그녀 역시 제부도의 파도 속으로 가속페달을 밟는다. 언젠가 자신이 떠나온 삶을 기억하며.
작품 속에서 그녀는 현재와 과거를 수시로 넘나 든다. 그때마다 빛바랜 기억들이 대뜸 불려 나온다. 놀라운 건 각기 다른 시간대에 머물던 장면들이 한 줄기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마치 어느 한 끄트머리만 잡아당겨도 줄줄이 걸려 나오는 감자나 고구마처럼. 시간의 사슬이 풀리면서 수면 위로 오랜 상처가 드러난다.
파도가 물러난 제부도. 길옆에는 자갈이 쌓이고 하얀 조개껍데기도 널려있다. 망연한 눈으로 터덜터덜 걷는 그녀를 따라가면서 나는 몇 개의 조각들을 주워 모았다. 하얀 싸리꽃과 갈매기, 뾰족한 자갈, 낡은 자동차, 소나무 가지에 걸린 헌 옷 같은 것들을.
흰 싸리꽃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흔한 꽃이었다. 어디에나 있지만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꽃. 싸리꽃이 피는 봄이면 그녀는 열병을 앓았다. 속으로만 품었던 욕망이 터져 나온 것일까. 결국 그 욕망에 이끌려 그녀는 달아난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물속으로 사라진 그가 꿈에서 그녀에게 건네준 것도 싸리꽃이었다. 싸리꽃 화환을 받아 들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녀의 손은 이내 핏빛으로 물들고 만다. 아름답던 화환이 날카로운 가시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비극을 초래할지 넌지시 일러주는 것처럼.
그녀를 비추는 두 번째 상징은 갈매기다. 학창 시절 수학여행에서 아이들의 눈초리를 피해 혼자 속울음을 삼켜야 했던 그녀. 우연히 창밖에서 발견한 갈매기의 날갯짓은 결연하고 확신에 차 보였다. 이윽고 다음 기차역에서 그녀는 탈출을 감행한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이 날개를 펼친 순간이었다.
뾰족한 자갈 역시 그녀를 닮았다. 물이 빠진 길을 지나가며 그는 말했었다. "파도에 늘 쓸릴 텐데 저렇게 뾰족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몰랐을 것이다. 풍파에 시달릴수록 예리하게 날을 세워야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밖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 낡은 자동차도, 나뭇가지에 걸려 바람에 나부끼는 옷가지도 그녀의 처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맴도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은 왜 다 그녀 뒤에 있는지.
그 남자는 종종 차가운 맥주병으로 치환된다. 차갑고 무심한 태도에 끌렸지만 실은 그게 전부였던 남자. 늘 자신의 애욕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던 그와 헤어진 밤이면 그녀는 술로 허전함을 달랬다. 흘러나온 몇 방울의 술이 그의 눈물이라고 상상하면서. 사무실 복도 끝에서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말할 때도 그에게선 희미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빈 맥주캔처럼 가벼운 관계를 원했던 그의 시선은 종종 허공을 비껴가곤 했다.
하루 두 번 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는 섬. 이 조수간만의 차는 중력에 의해 발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부도는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다. 태양과 달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조여 오는 운명의 고삐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수원과 인천 사이를 하루 두 번 왕복하는 협궤열차 역시 그들의 가혹한 운명을 견인한다. 매번 엇갈리면서도 서로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 열차 안에서 동굴 같은 눈으로 밖을 내다보던 여자는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의 환영이 아닐까. 엄마 역시 돌아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며 '텅 빈 동굴 같은 가슴으로 살아갔을'테니까.
사고 전날, 그가 사표를 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물속으로 사라진 것이 우연한 사고인지, 의도된 행동인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욱 거칠게 몰아치는 운명의 파도 앞에서 그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음을. 바다에 잠겨있지만 결국 이어진 육지와 섬처럼 우리의 삶도 끊임없이 길을 여닫고 있음을. 그 길 위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오늘도 나는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걸어가는 중이다. 사라지고 만나기를 거듭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