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게 속이 불편하면 일단 끓이고 봅니다.
어릴 때, 그래 봐야 20대지만,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와 처음 먹는 음식은 무조건 김치찌개였다. 빨간 기름이 자르르 덮여있는 김치찌개에 김이 풀풀 나는 뜨끈한 밥, 애착 이불만큼이나 보들보들한 계란말이가 필요했다. 거기에 작은 굴비 한 조각이 있으면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해외에서 한식을 찾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면 꼭 이 '입국 정식'이 먹고 싶었다.
20대엔 무슨 억하심정으로 그렇게 여행을 다녔는지, 1년에 두 번은 꼭 일주일에서 열흘, 길면 3주까지도 여행을 다녔다. 1월 2일 아침 9시에 전 직원이 임원들과 돌아가며 악수를 하는 '악수회'를 포함하는 - 그래서 주요 인물들은 누가 왔고, 오지 않았고를 알아챌 수 있는- 시무식이 시작되는데, 나는 1월 2일 아침 6시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아무것도 내 몸을 거스를 게 없는, 패턴이 화려한 원피스 한 조각을 입고 있다가 인천공항 화장실에서 검은 스타킹에 검은 내복, 검은 저지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다림질을 하지 않아도 되고 여행 가방에서 막 꺼내 입어도 그다지 표가 나지 않는 (내 생각이지만) 옷이었다. 시간이 촉박하지만, 그 와중에 인천공항 식당에서 '입국 정식'을 사 먹었다. 후루룩 빨간 국물을 들이켜고 회사 앞까지 가는 공항철도를 탔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오는 나를 멀리서 알아본 선배는 건물 뒷문 입구에 서서 지금 캐리어 끌고 시무식으로 바로 가면 뚝배기 깨진다며, 친절하게도 캐리어를 숨겨줬다. 올 한 해도 일을 열심히 해서 매출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보자는 결의를 하는 시무식에 내가 이제 막 입국해서 나사가 빠질대로 다 빠진 채로 들어왔으리라곤 손톱만큼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입국했어요?"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들 알아챈 것 같았다. 뚝배기는 깨졌고, 나는 사장실로 불려 가 한 소리를 들었으며, 한 일주일쯤 조금 더 호전적인 태도로 업무에 임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 눈치를 덜 봐도 될 때쯤, 나는 여름휴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고지서에 찍혀 나오는 비행기 티켓 금액을 보며 버텼다. 휴가를 가려고 일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그중에서도 '이태리 시골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같은 말들이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안 가는 여행지에 가서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들을 꼭 만들고 돌아오고야 마는,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다녔던 회사마다 해외로 휴가 가서까지 업무를 한다거나, 업무 관련 연락을 받아야 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물론 휴가 가기 전엔 바짝 야근을 해서 휴가기간 동안의 업무를 당겨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내 핸드폰은 열심히 사진기로만 쓰면 됐었다. '일을 안 해도 되는', '집착적으로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회사에서 벗어난 상황'을 즐긴 건지, 정말로 낯선 곳에서의 경험을 즐긴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매 번 도피가 답이 될 수는 없어."
누가 이런 소리를 나에게 하면 '여행을 나처럼 재미있게 해 보고서 그런 소릴 하라지!'라는 생각을 하며 오기를 부렸다. '그 돈으로 한국 시골을 가도 그 정도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이 생길 텐데'라는 말을 하는 사람과는 대화를 단절했다. 여행만이 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처럼 굴었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진.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상황이 되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첫해에는 과거 여행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다시 포스트 하며 여행을 그리워했었다. 나가지 못해 답답증으로 죽을 것 만 같다는 식의 포스팅들을 보며 공감했다. 그런데,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았다.
100%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 이후에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에 대한 갈증이 줄었다. 아마 전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예전에 비해서 많이 줄었다. 그 사이 부산이며, 제주도며, 강원도며 지방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아무튼 이태리를 못 가서 병이 나진 않았다. 이건 나에게도 낯선 나의 모습이었다. 결국 나의 여행의 동기의 대부분은 '도피'였고 '현실의 멈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심지어 일을 할 때도 나는 '도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 나에게 잔소리하듯 '조건부 행복'이나 '조건부 자유', 그러니까 '내가 지금 어디만 가면 참 자유롭게 살 수 있겠다'처럼 '~~ 하면'이라는 조건이 없어지는 게 진짜 자유로운 상태라는 소리를 했었다. 당연히 'X꼰대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태리 시골에서 아무렇게나 실오라기 하나를 걸치고 다니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아직 조건부 행복을 모두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애인과 '50억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면 뭐할까'같은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으니까. 지금 누가 이태리 여행 티켓을 주면서 제발 나를 위해 이태리 좀 다녀오라고 하면 기쁜 마음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잘 즐기고 오겠지. 그런데 그 자극이 지금 당장 나에게 절실하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버는 족족 여행하느라 다 써버린 내 과거를 후회하는 것도 아니다. 그 경험이 지금 나를 만들었고, 아직도 누워서 그때의 사진만 봐도 행복하다. 그 짜릿한 자극을 에너지가 충만하던 젊은 시절에 충분히 누렸던 것에 감사하다.
아무튼 여행에 목을 맬 땐 김치찌개가 좋았다. 삼겹살을 먹고도 김치찌개를 먹었고, 반찬이 없으면 김치찌개를 끓였다. 힘든 일이 있었던 날엔 동네 김치찌개 집에서 찌개에 소주를 먹기도 했다. 맵고, 짜고, 달고, 신 자극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그 맛을 여전히 좋아한다. 채식을 한 뒤로는 버섯을 낙낙히 넣고 토마토와 유부도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가끔 먹는다. 그런데, 예전처럼 자주 먹히지가 않는다. 채식 김치찌개의 맛이 고기를 넣어 끓인 것보다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 자극적인 맛보다 구수하고 슴슴한 된장국이 간절한 날이 더 많다. 친구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김찌'에서 '된찌'로 넘어가는 나이가 된 거라고. 김치찌개처럼 한 숟가락만 먹어도 온 입이, 머리카락이, 옷이 다 느끼는 그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그냥 옛날에 먹었던, 어제도 먹고 그제도 먹었던 그 순둥순둥 한 맛을 찾게 된다. 밖에서 조금만 오들오들 떨다 들어온 추운 날도, 뭘 잘못 먹고 속이 불편한 날도, 그냥 기분이 울적해서 위로가 필요한 날도, 냉장고에 애매하게 자투리 야채만 남은 날도 일단 된장을 풀고 본다. 도대체가 냉장고에 먹을게 하나도 없는 날도 일단 된장을 풀고 냉동실에 얼려둔 야채와 버섯이라도 넣어 끓인다. 엊그제도 먹은 것 같아서 좀 지겨운 감이 들어도, 막상 밥을 데워 먹기 시작하면 구수함이 이내 만족스럽다.
두부가 있어도, 없어도, 감자가 있어도, 없어도, 일단 된장을 풀고 나면 뭐든 넣으면 된다. 쑥만 넣어 쑥국을 끓여도 되고, 냉이만 넣어 냉이 된장국을 끓이기도 한다. 버섯, 감자, 양파, 대파, 두부, 애호박을 골고루 넣어 푸짐한 정석 찌개를 끓여도 된다. 겨울엔 시래기를 넣어 끓이고 여름엔 풋호박을 넣어 끓인다. 자글자글하게 강된장을 끓여서 쌈채소나 양배추찜, 호박잎 찜에 밥과 강된장을 넣어 한 쌈 크게 싸서 입에 가득 물고 씹는 쾌감도 좋다. 뭘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만 같은 된장으로 끓인 그 찌개의 맛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범위 안에 있다. 어차피 엄마가 담가준 된장을 쓰기 때문에 망할 일도 없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 나갈 정도의 메뉴는 아니지만 실패가 없다는 확신이 주는 위로가 있다.
된장엔 조건이 없다. 뭘 넣어도, 어디서 끓여도, 농도를 어떻게 끓여도 괜찮다.
** 어떻게 끓여도 맛있지만, 된장과 고추장을 모두 넣는건 내 취향이 아니다. 텁텁하니까. 고춧가루만 넣어 칼칼함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