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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린당나귀 Oct 07. 2024

[책을 읽고] 쓰게 될 것

세 편의 단편소설에 대한 이야기

올해의 소설책을 뽑자면, Top5 뭐 이렇게 줄세우고 싶지는 않은데, 강릉 여행가서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너라는 생활>과 요즘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최진영 작가의 <쓰게 될 것>이다. 최진영 작가는 친구가 추천해준 <겨울방학>으로 알게 됐다. 조카를 아주 아끼는 친구인데, 책에도 조카를 아주 아끼는 고모가 나온다. 두번째로는 <구의 증명>을 읽었다. 압도적으로 좋았다. 좋았는데, 이름은 같지만 <겨울 방학>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서 같은 작가가 정말 썼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쓰게 될 것>은 세번째로 읽은 최진영 작가의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고 느꼈다. 나는 최진영 작가가 아이 시점에서 쓴 소설들이 아주 좋다. 아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과 행동들을 생생하게 담아내서 아 나도 저 나이 때는 저랬지, 공감이 된다. 최진영 작가는 아이를 아주 유심하고 섬세하게 관찰한 것 같다. 그는 아마 이모이거나 고모임이 틀림 없다. 


소설집이 좋았던 이유는 내가 관심있는 주제들을 각 소설에 하나씩 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을 주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좋은 소설인 것 같다. 



표제작 <쓰게 될 것>은 <구의 증명>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어떤 전쟁인지는 모르지만 주인공의 할머니도, 엄마도, 아직 아이인 주인공도 전쟁 상황 속에 있다. 평생을 전쟁 속에 사는 팔레스타인들이 떠올랐다. 주인공은 세상에 존재하는 듯 아닌 듯 숨죽여 집에만 있고 엄마는 매일 나가서 먹을 것을 구해온다. 주인공이 보는 세계는 창문에 한정되어 있다. 


이 순간에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고 또한 퍼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독일도 그 전쟁의 책임이 꽤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러면 나도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묻게 된다. “전쟁은 어떻게 해야 끝날까”. 어른이 되어도 그런 질문의 답을 알 수는 없다. 독일에서 만난 팔레스타인에서 온 친구, 우크라이나에서 온 친구, 이란에서 온 친구들은 매일매일이 걱정이고 실시간으로 뉴스를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피곤한 직장인이 되어버려서 예전만큼 마음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다음주에는 꼭 시위에 가야지, 하고 생각하며 지낸다.  


"엄마가 일기에 썼던 문장을 기억한다. ‘죽어야 한다면 죽는 게 낫다.’ 나의 일기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살아야 한다면 사는 게 낫다.’ 무의미한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매일 밤 삶을 선택한다. 할머니에게도 총이 있었을까? 전쟁을 세 번 겪는 동안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전쟁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나의 신이었다. 그리고 나의 신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던 사람들. 자주 상상한다. 누군가를 죽여야마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을. 내가 죽어야만 누군가가 살 수 있는 상황을. 새벽마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겨눈다."




<썸머의 마술과학>에는 두 명의 어린이가 나온다. 조금 더 나이 있는 어린이와 조금 더 어린 어린이다. 둘의 나이차이가 크지 않은데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주 재미있었다. 언니는 벌써 기후위기에도 관심을 갖고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걸어 다니는 어린이다. 동생은 어릴때 코로나를 심하게 겪어, 집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안전하다고 느끼는 코로나 세대이다. 언니는 세상이 ‘망했다’라고 하지만 완전히 망하는 것을 유예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다. 텀블러도 갖고 다니고 스테인리스 빨대도 갖고 다닌다. 개인의 노력이 무엇을 바꿀 수 있냐고, 위선이라고 같은 반 남자애가 비아냥 거려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한국은 독일보다 기후위기의 신호를 더욱 받고있는 듯하다. 이번 여름만 해도 너무 덥고 너무 긴 여름이 지속되고, 최고기온은 매년 최고를 갱신한다. 정말 기온이 아니라 기후가 바뀌어 수확할 수 있는 과일이 달라졌고, 배추 값과 사과 값이 폭등한다. 기후 위기가 매일 매일을 바꿔 놓는데, 이 정도면 정말 큰 변화가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변화는 없는 것 같다. 이럴 때는 정말 왜 그럴까, 지금이라도 바뀌기 시작하지 않으면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든다. 내가 독일에 온지 6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한국의 여름은 그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앞으로 살게 될 날들이 6년보다는 길텐데, 그러면 어떤 게 얼마나 더 바뀌어야 한다는 것일까.  


"아이들은 많은 것을 단숨에 외우고 자세하게 기억한다.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스스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정말 열심히 한다. 소용없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더는 하지 않는 일들을 아이들은 한다. 그레타 툰베리는 썸머와 비슷한 나이에 처음 의문을 품었다.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와 비슷한 나이에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분노를 쏟아내며 연설했다. 그 연설 영상을 수십 번 봤다. 보면 볼수록 나 또한 화가 났고,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했다. 툰베리가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면 실감하지 못했을 거다. 나는 툰베리처럼 화석 에너지를 쓰지 않기 위해 태양광 요트를 타고 바다를 건널 자신은 없다.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할 용기도 없다. 마음에 드는 옷을 보면 사고 싶고 평생 치킨을 먹지 않고 살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친구들이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라며 등교 거부 시위를 한다면 참여할 것이다. 비건을 위한 급식 식단을 따로 마련하라는 서명서에 내 이름을 적을 것이다. 계속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들고 다닐 것이다. 임준석이 또 개똥 같은 말로 나를 모욕한다면 오늘 아빠에게 그런 것처럼 화를 내고 싸울 것이다. 위악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망하고 싶으면 너 혼자 망하라고 확실하게 말할 것이다."





<홈 스위트 홈>은 삶의 중력을 다시 지금 이곳으로 불러오는 소설이었다. 처음에는 살아본 집에 대한 기억, 살게 될 집에 대한 기억으로 시작해서 조금 의아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입이 되었고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어느 일요일 날 이 소설을 읽어서 훌쩍거리면서도 행복했다. 엄마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뜬금없이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이번에 독일에 와서도 ‘엄마가 언제 죽으면 안 슬플 것 같냐’고 했다. 어렸을 때는 엄마의 죽음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차올랐는데 이제는 면역이 되었는지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60이 되도, 70이 되도 엄마의 죽음은 슬플 것 같다. 


이 소설은 반대로, 딸이자 연인인 한 사람이 어디서 죽을지 결정하는 내용이다. <에이징 솔로>와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를 읽고 부쩍 집에서 죽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리고 평생 혼자 살아도 서로를 돌보면서 늙어갈 수 있는 혼자들의 공동체도 상상했다. 주인공은 절대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자신이 폐가를 고쳐 죽을 집을 만들어나간다. 집이란 앞으로 인생을 ‘살’ 곳인데 죽을 장소로 집을 구한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소설의 다정한 문장들이 말하듯이 죽기 전에 말할 문장들은 아무래도 싫거나 혐오의 문장보다는 사랑에 관한 것들일 것 같다. 나 자신이 나만 기억하는 작은 기억들의 모음이라는 표현도 좋았다.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이 문장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는 차 안에서 자주 다퉜다. 다투지 않을 때는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말을 나눴다. 산을 보면 산이 참 높다고, 바다를 보면 바다가 참 넓다고, 꽃을 보면 참 곱다는 말들. 그리고 어느 날엔 이런 이야기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쓸 거야. 자연스럽게 떠날 수 있도록 두라는 뜻이야. 내 몸에 어떤 튜브도 넣지 말고 나를 살리겠다고 가슴을 짓누르지도 말란 뜻이야. 엄마, 잘 기억해. 나는 꼭 작별 인사를 남길 거야. 마지막으로 내가 한숨을 쉬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비명을 지르면 그건 사랑한다는 뜻이야. 간신히 내뱉는 그 어떤 단어든 사랑한다는 뜻일 거야. 듣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사랑을 여기 두고 떠날 거야. 같은 말을 어진에게도 했다. 사랑을 두고 갈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자유로울 거야. 사랑은 때로 무거웠어. 그건 나를 지치게 했지. 사랑은 나를 치사하게 만들고, 하찮게 만들고, 세상 가장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어. 하지만 대부분 날들에 나를 살아 있게 했어. 살고 싶게 했지. 어진아, 잘 기억해. 나는 이곳에 그 마음을 두고 가볍게 떠날 거야. 그리고 하나 더."



내가 마지막으로 생을 보내고 싶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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