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존재와 의미는 겨우살이를 빼닮은 ‘기생’에 일치했다.
좋은 방법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관뒀고, 더 나은 방법이랄 게 분명 존재할 거라고 신앙하게 됐지. 성과는 아직 미미하기만 한데 이쯤에서 관두자니 매몰된 시간이 그리 적지도 않다. 어쩌면 이제는 더 나은 방법이랄 게,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마음가짐이 된 것도 같지. 세상은 이런 마음가짐을 두고서 아집이라고 했었나, 아니면 미련이라고 이름 지었던가. 부르는 방법이 따로 있었단 걸 알고 있었는데 가물가물하다.
한 번도 증명된 적 없는 신앙에
매몰된 시간이 적지 않은 탓이었다.
성능이 저하된 머리통은 벌써 이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이었고, 다르게는 이 삶이 낭비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원흉이었다. 그러고 보면 난 늘 흉내를 내고 싶지 않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좋은 방법’을 곧잘 훔쳐보고 흘겨봤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예사롭지 않은 집착이 있었다.
어쩌면 요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마죽에 예사롭지 않은 집착을 가진 사내*와 닮아있는 게 아닐까. 낱말과 문장에 의존해 그려지는 사내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썩 좋은 기분이 들진 않아서 이딴 잡념은 폐기하기로 했다. 하여튼 더 나은 방법이랄 게 분명 존재할 거라고 신앙하는 삶이었다. 세상에 유행하는 방법이 무엇이고 권장하는 방법이란 게 무엇이든 간에 그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리라 믿어왔다.
의심치 않았다는 말은 덧붙이려다 포기했다. 근거도 마땅찮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이니까, 믿음 뒤에 의심치 않았다는 말을 감히 덧붙일 순 없겠더라고. 쓸데없이 각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늘 이런 식이었다. 내가 좀 그렇다.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일에 무척이나 각박하다. 그래서 좋은 방법에 대한 연구도 일찍이 관둬버린 거지.
유행과 권장의 범주 아래 머무는 그것을 아무리 들여다보며 내 삶에 접목接木시키려 애써봤자, 내 존재와 의미는 겨우살이를 빼닮은 ‘기생寄生’에 일치했다. 그것이 적용되는 삶이 절대적인 다수일 순 있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외로 나아가는 소수마저도 포용하는 방법론은 아니었지. 이런 탓에 더 나은 방법이란 게 존재할 거라고 신앙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유행하는 방법이 무엇이고 권장하는 방법이란 게 무엇이든 간에 그보다 더 나은: 다른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리라 믿어왔다. 성과는 아직 미미하기만 하지만 어쨌든, 아무튼, 아마도, 있을 거라고, 있어야만 한다고 신앙해 왔는데_ 믿음의 가치는 배신에 있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단했다.
돌아갈 곳이 있단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더니 돌아가는 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두 가질 순 없다는 말이 지나치게 비합리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하나를 위해서는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만 한다는데, 전부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온갖 의문만 꼬여 들었지.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엇을 내려놓은 건지,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마만치 생각해 봐도 꼬인 의문이 풀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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