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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폐암 vs 우울증, 누가 더 아프실까?

by 마님의 남편


익숙해진다는 것의 슬픔


오늘도 나는 말기 폐암을 앓고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아산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입구를 지날 때마다 코끝을 파고드는 소독약 냄새, 복도를 가득 채운 지친 발걸음의 울림—이 모든 것이 이제는 익숙하다.


우리 삶에서 '익숙해진다는 것', 그것은 때로 적응이라는 이름의 평안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오래 이 고통과 함께해 왔는지를 증명하는 씁쓸한 훈장이기도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병원 로비에는 절망과 체념이 안개처럼 떠돈다. 하지만 그 사이사이, 환하게 웃는 환자와 보호자의 얼굴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 웃음은 마치 어둠 속 촛불처럼, 작지만 확실하게 존재한다. 희망이란 것이 있다면 아마 그런 모습일 것이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그저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




시간이 멈춘 듯, 그러나 너무 빨리 흐르는


아버지가 말기 폐암 진단을 받으신 지 어느덧 3년 반이 흘렀다. 표적항암제가 선전했던 시간 동안 우리는 기적을 믿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적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최근 두세 달 사이, 4cm가 넘는 종양이 척추와 늑골에서 발견되었다.


암은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해서,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다시 아버지의 몸 한 구석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시간은 기묘하게 흐른다. 어떤 날은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고, 어떤 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일주일의 입원, 일주일의 통원,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방사선 치료. 단 10분의 치료를 위해 하루 전체를 비워야 한다.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검사를 기다리는 시간은 이제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린다. 결과를, 희망을, 혹은 기적을.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요즘 아버지의 시선은 어머니를 향한다. 가슴 깊숙한 곳을 칼로 후비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걱정하시는 것은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다. 말기 암 환자인 본인보다 어머니가 더 아프다고, 아버지는 진심으로 믿으신다.


이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묻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고통을 잊고 타인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아버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을 실천하고 계신다. 비록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건강하게 어머니를 향해 뛰고 있다.




비교할 수 없는 두 가지 고통


말기 폐암과 우울증. 누가 더 아플까? 이런 미련한 질문을 잠시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어떤 답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암세포는 육체를 잠식하고, 우울증은 영혼을 잠식하는 고통일 뿐 경쟁 상대도 정답도 없기때문이다. 둘 다 잔인하고, 둘 다 외롭고, 둘 다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이 시간을 함께 견디며 나는 하나의 진실을 발견했다. 고통의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 뿌리는 같다는 것. 바로 '외로움'이다. 아버지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 홀로 싸우신다. 아무리 가족이 곁에 있어도, 그 통증은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다. 어머니는 마음의 어둠 속에서 고립되어 계신다. 햇빛이 들어와도, 그 어둠은 어머니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분 모두 상대방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서로를 향한 연민과 사랑으로 고통을 감당하려 애쓰신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먹먹하다. 슬프지만 아름답고, 아프지만 따뜻하다.




고난이 가르쳐준 것


아버지의 병을 통해 나는 삶과 죽음에 대해 더 자주,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사랑과 희생이 꽃처럼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매일 배운다. 때문에 때로는 스스로가 철학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와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쓴맛 뒤에 은은한 단맛이 번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은 때때로 가장 어려운 시험지를 우리 앞에 내민다. 아무도 풀어본 적 없는, 정답이 없는 것 같은 문제들로 가득한.


하지만 우리는 그 시험지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어른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힘들 때 잠시 멈춰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할 여유를 잃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 작은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도 견뎌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오늘 마신 커피는 빈식스 마일드 스페셜입니다. 어느새 12월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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