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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빵'으로 시작한 파로에서의 휴가

European Nights: 엄마를 위한 천일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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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비행기에 올라 포르투갈 파로 공항에 내렸는데 너무 배가 고팠어. 호텔에서도 시간이 늦어 음료 외에는 불가능하다고 하길래 애꿎은 음료만 홀짝이고 있었지. 그러다가 바텐더 옆에 놓인 쇼케이스에 빵이 보이는거야.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빵을 가르키면서 주문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직원이 영어를 할 줄 몰랐어. 한참 말이 안 통해서 실갱이하던 중에 불현듯 빵이 포르투갈어에서 온 말이라는걸 어딘가에서 읽었던게 기억났어. 발음이 이게 맞을까 싶었지만 ‘빵!’하고 외쳤더니 직원이 갑자기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빵을 꺼내주더라. 남자친구가 포르투갈어도 할 줄 아느냐고 묻길래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국어로 빵과 가방이 포르투갈어에 기원을 두었다는 것만 안다고, 이게 통할까 싶어 해본 말이라고 했지. 정말 ‘빵’이라고 하니까 바로 알아듣는게 너무 신기했지뭐야.







독일의 기나긴 겨울이 지긋지긋해서 도망치듯이 어디든 남쪽이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떠나온 곳이라,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도시였는데 친구들에게 얘기했더니 영국에서는 유명한 여행지라는거야. 심지어 친구네 가족은 여길 제주도 오듯이 자주 왔다는데, 위치상 주로 영국 서쪽에 위치한 공항들에서 이곳으로 오는 비행편이 많은 모양이야. 크로아티아 도시 한 복판에 위치한 DM을 보고 그 곳이 독일인들이 좋아하는 휴가지라는 것을 눈치챈 것처럼 공항 내 WHSmith와 Costa를 보고 이 곳에서는 영국인들을 많이 볼 수 있겠다는 예상을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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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난 여행지였는데, 이 곳에서 본 풍경은 기대 이상인걸 넘어 이곳을 보러 꼭 와 볼만하다란 생각이 들었어. 생각해보니 내가 유럽에서 북해, 발트해, 지중해, 아드리아해 등 많은 바다를 봤는데도 막상 서쪽의 대서양을 보러온 적이 없더라. 파로가 스페인 국경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라 별 생각없이 지중해 도시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은 지브롤터 서쪽에 위치한 곳이었어. 그래서인지 날씨는 초여름 마냥 덥고 해가 쨍쨍한데도 바닷물이 차갑고 확실히 파도가 거칠더라. 수온에 따라서 바다 색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평소에 내가 아는 지중해과 비교해 더욱 파란 빛이 짙은 그런 물빛이었어. 배를 타고 돌고래를 보러 나갔는데 꽤 더운 날씨에도 바다로 나가자마자 바로 바람이 거칠고 차가운게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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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탄 목적은 돌고래보다도 근처에 있는 베나길 동굴때문이었어. 천장이 뚫려 있는 거대한 해식 동굴인데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동굴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위에서 내려다 볼 수도 있고, 우리처럼 바다에서 배나 패들보드, 카약 등을 이용해 동굴 내부로 들어갈 수도 있어. 보트들이 순서대로 좁은 입구를 따라 들어서면 돔처럼 생긴 큰 동굴에 다다르게 되는데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바닷물은 에메랄드빛으로, 모래는 황금빛으로 바뀌는 마법같은 곳이야.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실제로 가서 마주 했을 때 훨씬 더 독특하고 인상적인 곳이었어. 사진에는 담기지 않는 성스럽고 신비한 분위기가 있거든. 마치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성당 내부를 비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 수심이 깊은 바다를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한 동굴인데도 패들보드와 카약으로 내부까지 들어와 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 보트로는 내리는게 불가능해서 나도 패들보드나 카약을 타볼까 했는데 지중해와는 다르게 다소 거친 대서양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지더라. 어떤 방법을 통하든지 동굴로 들어가는 그 여정 자체가 일종의 모험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어. 나는 그림 그리는 것에는 영 소질도 흥미도 없지만 가능만 하다면 사진보다는 내가 본 것을 그려서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유일한 곳이었달까. 원래 목표였던 돌고래는 한 시간을 넘게 헤매고도 만나지 못했지만 이 동굴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값을 했다고 느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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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나길 동굴만으로도 파로에 올 이유가 충분했는데, 다음 날 방문한 Ilha Deserta라는 무인도도 빼놓을 수 없는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야. 바다 수영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나는 근처 바다에 가보고 싶었거든. 내가 미리 봐두었던 근처 바닷가 대신 남자친구가 정한 행선지였는데 정말 가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무인도라니 여러모로 귀찮기만 할거란 생각이었는데, 배를 타고 잠깐만 나와도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게 무척 놀라웠어. 무인도에 이 곳을 오가는 배도 자주 없는 섬이지만, 어느 방향을 가더라도 모래사장과 깨끗한 바닷물을 볼 수 있는 곳이었어. 특히 7km도 넘게 길게 뻗은 모래사장에는 사람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어서 마치 TV에서나 보았던 사막에 맞닿은 아라비아해가 이런 느낌일까 싶었어. 끝도 없이 펼쳐진 모래 사장은 마치 사막처럼 보이고, 해는 뜨겁고, 주위에 사람은 커녕 사람이 머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아 갑자기 길을 잃은 것 같았어. 예전에 내가 혼자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면 사막과 같이 사방이 탁 트여 있다 하더라도 폐소공포증을 느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이런 기분일까. 모래 언덕 위에서 썰매를 타러 갔던 호주의 사막과는 느낌이 너무 달랐어. 태어나서 처음 보는 생경한 풍경이었는데, 흡사 내 눈에 보이는 해안 끝까지,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을 듯한 그런 막막함은 생전 처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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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방문하는 포르투갈에서 가장 기대했던 음식은 포르투갈식 치킨이었어. 지금은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식었지만 20년 전만 해도 영국 여행에서 많이 찾던 Nando’s라는 음식점이 있었거든. 포르투갈식으로 조리한 치킨을 파는 곳인데 전기구이 통닭이랑 비슷해서 우리에게 익숙한 맛인데다가, 학생할인까지 해줬던 곳이라 저렴한 값에 한 끼를 해결하러 자주 갔었거든. 원조는 어떤 맛일까 하고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평범한 맛이라서 조금 실망스러웠어. 대신 스페인의 빠에야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해물밥(Arroz de Marisco)이 충격적으로 맛있었어. 빠에야는 뜸을 들이지 않아 약간 설익은 듯한 쌀이 영 거슬리는데다가 해물의 맛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데, 수제비를 담아주는 항아리 같은 그릇에 담겨나온 포르투갈의 해물밥은 게를 포함한 각종 해산물이 그 항아리 가득 담겨서 퍼도 퍼도 계속 해물이 솟아나는 화수분 같았어. 한 입 먹자마자 아빠 생각이 나더라. 한국에서 여기 오기 너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엄마 아빠 어떻게 데려오나 걱정이 되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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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 시내를 걷다보면 유난히도 화려한 색의 건물들이 많이 보여. 건물들을 구경하다 보면 눈에많이 띄이는 게 바로 타일 장식(Azulejos)이야. 아랍어인 ‘Al zellij’은 광택 있는 타일이란 뜻인데 이 곳의 타일은 이슬람 + 북아프리카 + 유럽 양식이 섞여서 발전했어. 미적으로 예쁘기만 할 뿐 아니라 더운 지역에서 내부 온도를 낮추면서 습기를 막아주는 기능적 측면도 있지. 스페인 남부지방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서 타일이 많이 발달했지만 두 지역의 타일은 확연하게 구분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다르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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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기에 두 지역 타일의 차이점은 두 가지야. 하나는 색상. 아줄레주 타일은 보통 흰색 바탕에 코발트블루로 그림을 그린 형태거든. 얼핏 보면 델프트 블루 같기도 하지만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은 델프트 블루는 더 짙은 남색이야. 한편 스페인의 타일은 초록, 파랑, 노랑 등 다양한 원색을 써서 만들어. 지금은 아줄레주를 만들때도 다양한 색을 쓴다고 하지만 전통 아줄레주의 순정은 흰색과 코발트 블루의 조화라고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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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의 특징은 아줄레주는 여러 개의 타일이 모여서 하나의 그림을 이루는 형태라는 점이야. 스페인 타일은 이슬람 예술의 특징대로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문양을 반복적으로 혹은 대칭시켜서 만들거든. 그래서 타일 하나로도 무늬가 완성형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아줄레주는 여러 개의 타일을 한번에 놓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식으로 활용되어서, 타일의 순서나 위치가 바뀌거나, 전체가 아닌 타일 한 장만으로는 완성이 되지 않아. 나중에 내 집이 생기면 아줄레주 느낌이 나는 타일을 놓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현관 앞 바닥이라든가 벽면 한 쪽을 아줄레주 타일로 한 폭의 그림처럼 놓으면 예쁠 것 같지 않아?







유럽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성당 구경인데, 파로에 있는 성당 중에는 약 1200개의 수도사들의 해골과 뼈를 모아서 장식한 예배실이 있는 곳도 있어. 인신공양이랑은 전혀 관계가 없고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유로 만들어진 곳이야. 조금은 으스스할 것 같은 이 곳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아?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언젠가 다시 시작할 나의 열한번째 편지를 기다려주겠어?




Um beijo grande, até a próxi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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