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나는 기이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가령 회식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가 정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 잡혔다. 유체이탈도 아닌 것이 정신이 딴 데 팔린 것만도 딱히 아닌 것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통제되지 못한 무기력한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 나는 내가 있는 그 자리의 그 순간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김 차장,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박 부장은 맥주병을 들어 내 잔에 따라주며 말했다.
나는 얼결에 맥주잔을 들어 기울였다. 그러나 박 부장이 치켜든 맥주병에서 쏟아져 나오는 맥주와 리듬이 맞지 않았다. 내 화이트 플리츠스커트 위로 맥주가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코, 이런 어째."
박 부장은 얼른 자기 손으로 내 치맛자락을 훔쳤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서 치맛자락을 털었다.
무슨 벌레라도 기어든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탈탈탈. 탈탈탈.
"어? 이런 내가 급한 마음에... 불쾌했다면 미안해, 김 차장.
김 차장 깔끔한 성격,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쏘리쏘리."
그놈의 또 누구보다...... 박 부장은 늘 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한다.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아닌 직장 상사일 뿐인 그가 도대체 나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할 자격이나 권리가 있을까.
그런 식의 표현으로 몇 번의 구애를 거절한 나를 향한 가스라이팅을 하는 걸까. 아니면 몇 번이고 거절당한 자신을 그런 식으로 위로하는 걸까.
"누구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박 부장을 똑바로 쳐다본다. 다소 날카로운 나의 목소리에 박 부장이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부장님이 뭔데 누구보다 날 잘 안데요? 왜요? 뭔데요? 가족이에요? 연인이에요? 친구예요?
그들도 나를 모르는데 부장님이 뭔데 누구보다 나를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냐고요."
나는 박 부장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들었다. 그 기세가 점점 강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강 차장이 나를 막아섰다.
"취했구나... 김 차장. 부장님, 김 차장이 많이 취했나 봐요.
빈 속에 술을 들이붓더니... 자 가자. 나가자. 김 차장"
강 차장은 내 가방을 집어 들고 자신의 가방도 어깨에 메었다.
"먼저 갈게요 오늘 일은 모두 기억에서 삭제요!"
강 차장은 나를 끌다시피 해서 술집을 빠져나왔다.
"또또또. 화살이 다른 델 향해 꽂혔냐?"
강 차장은 비틀거리는 나를 술집 앞에 잠시 앉힌다.
"여기 잠깐 있어. 술 깨는 약 좀 사 올 테니까."
나는 쪼그리고 앉은 채 바닥을 본다.
툭. 난데없는 눈물 한 방울이 바닥에 떨어진다. 툭 툭. 또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이 점점 차 올라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때 빗방울이 툭, 떨어진다.
툭. 툭. 빗방울이 거세진다. 엉엉. 흑흑. 나는 소리를 내어 운다.
통곡의 소리가 빗 속에 묻혔다. 살아났다. 한다.
그 빗줄기 속에서 비로소 나는 나의 존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내 존재는 그날 이후, 늘 오직 한 곳에 지금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그곳에서 그가 이별을 통보하기 전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너를 사랑해.
사랑을 나눈 후 내 귓불을 만지며 내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거센 빗줄기 속에서도 폭풍우 소리 속에서도 살아나 더욱 선명하게 내 귓가를 맴돌았다.
귀를 막아도 그 소리는 빗소리보다 점점 크게 내게 들려왔다.
"왜, 이 비를 다 맞고 있었어? 미련하게?"
숙취약을 든 강 차장이 우산을 씌워 준다.
우웩.
갑자기 쏟아질 것 같은 입을 틀어막고 나는 술집 화장실로 내달린다.
변기통 속에 머리를 박고 쏟아낸다.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모든 걸 쏟아내고 싶지는 않다.
모든 걸 쏟아내면 마침내 내 존재가 사라질지도 몰라.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낯선 내가 거울 속에 서 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손잡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힘주어 돌리고 돌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때, 문 밖에서 화재경보 소리가 울린다.
소리는 점점 커져 울려 퍼진다.
문 틈 사이로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가방 속 휴대폰을 찾는다.
습관적으로 1번 버튼을 길게 누른다. 하트표시가 그려진 발신번호에 신호가 간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더 이상 내 삶에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비존재 속에서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가 이별을 통보한 비 오는 날의 길 구석에 앉아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