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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자를 위한 판타지

<룸 넥스트 도어>(페드로 알모도바르, 2024)

by 백희원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우리는 각자 다 다른 시간축을 가진 행성 같은 존재들이고, 이 세계에 우연히 떨어졌고,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같은 우주에 속해있고, 그 광막하고 희미한 공통감 속에서 각자 살아남는 일에 최대한 친절하게 협조해야 한다고. 그것이 아마 우정이라는 것의 역할이라고. 다시 말하지만 예전에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은 우정이 무엇이라고 정의할 능력도 마음도 없다. 참고로 이제 나라는 행성은 친밀한 타인들의 발자국으로 얼룩져 여기저기 패인 자국들이 가득한데, 그건 가까이서 보면 찐득한 눈물 콧물 자국 같을 수 있지만 멀리서 보면 그냥 웃는 얼굴 같겠지.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냥 우리가 서로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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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보고는 예전의 그 생각,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그 판타지를 오랜만에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영화의 배경은 설정상 뉴욕인데, 다른 작품들에서 봤던 뉴욕과는 채도도 명도도 다르다. (실제로 많은 부분이 마드리드에서 촬영되었다고 함) 게다가 모든 씬이 근사한 유화같아서 비현실적이다. 그런 삽화적인 세계 속에서, 강물처럼 흘러가는 관현악 선율의 유속에 이끌려, 이 이야기는 진행된다. 이게 중요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표면을 지닌 영화라는 게. 그게 이 영화의 힘이다. 이건 삶과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우화야. 하지만 존엄사에 대한 천진한 매니페스토이고, 동시에 기성 세대 지식인들이 요즘 세상의 분쟁과 폭력과 생태적 한계에 대해 느끼는 무능감의 한 징후야. 그런데 이건 결국 알모도바르 영화일 뿐이야. 거부할 수 없이 아름답지.



작가인 잉그리드(줄리언 무어)는 오래 전 친밀한 사이였던 종군기자 마사(틸다 스윈튼)로부터 존엄사 계획을 공유받는다. 마사는 희망없고 인지력을 망가트리는 항암치료로 연명할 생각이 없다며 다크웹에서 안락사 약을 구했다고, 이제 죽음을 결행할 동안 자신의 옆 방(룸 넥스트 도어)에 머무를 가까운 타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종군기자로 살아온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정통한 인물이다. 가족, 친구, 일상과 얼마나 떨어진 곳에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감탄스러울 만큼 정확히 안다. 삶의 마지막을 섬세하고 아름답고 말끔하게 계획-집행하는 모습은 너무나 백인, 여자, 엘리트적인 것이기도 해서 보면서 약간 질리는 감도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마사가 가장 바라는 상태로 바라는 순간, 바라는 장소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내게 영화 속 가장 환상적인 죽음들 중 하나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 영화라는 장르는 항상 섹스나 폭력같은 걸 유구하고 다양하게 쾌락적으로 담아왔는데 완벽한 죽음도 좀 담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레몬, 햇살, 망고무스 케이크 같이 환한 죽음. 난 마사처럼 죽고 싶지 않다.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영화가 이런 경험을 제공해주는 건 찬성이다. 현실은 전혀 그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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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생동감 있는 건 잉그리드 역할을 맡은 줄리언 무어 뿐이다. 왜일까. 약간의 거짓말을 하며 지나친 선의를 베풀고, 두려움이 많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모순적인 선택을 하는 잉그리드. 줄리언 무어는 물빛 눈동자와 다정스러운 목소리, 얼굴의 주름들로 풍부한 뉘앙스를 발산하며 잉그리드가 되었다. 그 불분명함이 아마도 살아있다는 느낌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변덕스러운 것. 흐리고 어렴풋한 것. 눈이 내리면 우리 살아있는 것들은 그 차가움을 알아차릴 것이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죽은 저들 위로는 녹지 않는 눈이 쌓여갈 것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살아있는 나는 모른다. 다만 눈이 올 때면 기억해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건 죽은 자들 위로도 내린다는 것을. 언젠가 나도 그 안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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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셰트>(1967, 로베르 브레송)의 마지막 씬, <멜랑콜리아>(2011, 라스 폰 트리에)의 마지막 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