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여름의 불꽃같은 분노 ⟪이사⟫(소마이 신지, 1993)
씨네큐브에서 ⟪이사⟫(소마이 신지, 1993)를 봤다. “무슨 생각에 그렇게 잠겼어?” 극장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누군가 곁에 건네는 문장이 쏙 들려왔다. 꼭 내게 하는 말 같았다.
선연하고 아프고 빛나는 여름 영화. 내게는 그 중에서도 불꽃같은 주인공 렌의 분노가 특히 빛나보였다. 우루시바 렌. 초등학생. 부모의 이혼으로 하루 아침에 호시노 렌을 종용받게 되었고,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있다. 렌은 모욕을 당하면 바로 맞받아 뺨을 치고, 항의하고, 냅다 달려 도망치고, 버티고, 불지르기도 서슴지 않는다. 왜 이것이 눈부셨을까? 실은 내가 얼마 전 상담 선생님에게 이런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인은 희노애락 중 노가 가장 없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상황 때문에 별 수 없이 화가 나니까 마음이 불편하죠. 자기본질과 아주 떨어진 감정이거든. 나답지 않은 게 내 안에 있으니 얼마나 불편하겠어.”
맞는 말이었다. 내게 분노는 이질적이고, 그래서 귀기울이기 어려운 감정이다. 우울이나 슬픔과 비교하면 뚜렷이 그렇다. 우울도 슬픔도 괴롭지만 나는 그 감정들에 어떻게 머무를지, 또 그 감정들을 어떻게 보낼지 너무 잘 안다. 익숙한 괴로움에는 약간의 안온함도 있다. 하지만 분노는 다르다. 내 안에 그런 공격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당황스럽다. 얼른 부정하고 꺼뜨리는 자동 진화 시스템이 순식간에 작동된다. 때론 나 자신조차 모르는 사이에. 그러고 나면 그야말로 ‘짜게 식은’ 무망함 같은 게 후일 발견되기 때문에 이 진화 시스템은 사실 예방이 아니라 지연에 가까운 단기처방이다. 때로는 자기보호를 소홀히 했다는 좌절감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아, 자아비판을 하려고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렌, 뭘 봐도 자꾸 자신의 이야기거리가 떠오른다는 건 참 어른스러운(negative)단점이다. 혼자 남은 널 두고 자기 상처 얘기에 여념이 없던 부모들처럼.
분노든 무엇이든 관객인 내 마음에 무언가 빛나는 게 와닿은 건 아무튼 ⟪이사⟫가 잘 만든 계절 영화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계절과 날씨는 가장 직관적인 은유고, 변화와 성장은 가장 보편적인 이야기니까. 영화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렌의 감정선이 여름이라는 예측 가능한 플롯 안에서 극을 자유롭게 이끌도록 둔다. 이혼이라는 장마로 시작하지만 파란 뭉게 구름의 희망을 품어보기도 하고, 바캉스와 불꽃놀이 끝에 방황을 품어주는 울창한 여름 숲과 상실을 수용하는 호수를 만나며 렌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해낸다. 이 뿐 아니라 영화의 모든 장면이 인상적인데, 특히 공간 구성과 카메라 워크를 십분 활용해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실내 장면들(도입부의 식탁 식사 시퀀스, 친구와의 복도 대화, 열린 계단에서 후배 커플의 대화를 엿듣기, 엄마와의 다다미 술래잡기, 좁은 복도에서의 부부싸움 등)이 기억에 남는다. 음악은 이 이야기가 얼마나 진지하고 장엄한 것인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역설하지만 전체를 해치지는 않는다.
이 잘짜여진 씬들이 작위적이거나 지나치게 ‘예술 영화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정말이지 주인공 렌을 연기한 타바타 토모코 덕이다. 이 배우의 솔직한 움직임, 표정, 목소리가 정말 좋은 운율로 장면들을 이끌어 나간다. 가장 슬픈 순간에도 아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문워크로 갈등 상황을 빠져나간다. 순수하게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도 부당함에 단호하고 거침없이 불을 질러 버리기도 한다. 그 와중에 풋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의 순간들이 있다. 그토록 진지한 심정임에도. 그 마음. 그건 그냥 그의 울림있는 무표정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된다. 심각한 표정 같은 걸 따로 지을 필요가 없다.
영화 후반부로 향할 수록, 성장한다는 것은 정말 끔찍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행인 건 생애 한 번 뿐이라는 것. 렌은 상실도 추억도 수 없이 겪었을 백발 성성한 노인의 옆에 앉아 펑펑 터지는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그런 뒤 외친다. “나 빨리 어른이 될게. 미래로 갈게.” 나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 앞에서 주눅드는 대신 미래로 달려가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다. 어쩜 그렇게 정면을 잘 바라볼 수 있는지. 우정의 힘도 계절의 힘도, 저축통장도, 꿈도, 방학숙제도 모두모두 끌어 쓰면서.
후반부 렌이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을 그리며, 현실에서 환상으로, 다시 일상으로 전환하는 타이밍은 감탄이 나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사⟫는 내게 전반부의 분노 자체에 대한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뭐랄까. 어린이가 주인공인 영화는 어떤 감정이든 정당화해내는 것 같다. 아무리 미숙한 감정이어도 어린이 인물을 통하면 납득도 되고 수용도 된다. 왜냐면 어린이는 그것을 처음 겪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화를 참지 못하는 건 아이다운 것일까? 그보단 언어가 없는 사람, 어떤 통제권도 갖지 못한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 의사는 무시당한 채 급진적 변화를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처지에서 비롯된 분노. 렌은 이해할 맥락도, 시간도 받지 못하고 하루 사이 달라진 가족을 종용받았다. 화가 날만해. 불꽃 튀듯 터져나오는 감정의 표출. 그건 아무튼 무언가를 전달한다. 서툴고 엉망진창이어도 랠리가 이어진다. 홀로 고통스럽지 않다. 모두가 괴롭다. 이상하지만, 그 편이 고통을 지나는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또 모두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
렌에게. 얼마 전 나는 화를 내는 긴 편지를 썼다. 그랬더니 맨 끝에 사랑이 있었다. 쓰지 않았다면 몰랐을텐데. 상처도 화도 거기서 연원했다는 진실을 알고나니까 더 이상 내 안의 분노가 불편하지 않았다. 미래에도 미래가 있고, 어른은 아이와는 다른 종류의 어른되기를 끝없이 경험한다. 렌 덕분에 둘을 위한 규칙을 함께 쓰기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엄마 호시노 나시나처럼. 하지만 어른은 인정하지 못한 채 후회에 머무르는 게 다일 때도 있다. 아빠 우루시바 유스케처럼. 그와 달리 어린시절의 고통은 분명 의미가 있다. 그러니 힘내. 앞으로도 아주 많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크게 웃음을 지어보이기를. 나? 나는 편지를 전달한 일에 대해 조금 더 매끄러울 수 없었을까 자꾸 자문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게 필요한 서투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다 되었다는 핑계로, 나의 관성에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해. 앞으로는 서투르게 화내는 일에도 주저하지 않으려고. 나는 천천히 어른이 될게. 렌처럼 자기 욕구에 솔직하고 그때 그때 화낼 줄 아는 어른이.
p.s. - 불을 지르겠다거나 뺨을 때리겠다는 건 아니야. 어른은 연약해서 그러면 화해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