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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거리의 미학

윤현희 교수님의 책 <치유의 미술관>을 읽으며

by 리코더곰쌤

일부러 천천히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보통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사진도 찍고 필사도 하는데 어느 순간 그래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매 페이지, 모든 문장이 마음에 든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정독을 하며 나의 DNA에 지문처럼 새겨 놓고 싶은 책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그득한데 후다닥 읽었다가는 니맛도 내맛도 모를까봐 일주일에 걸쳐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향수를 시향하면 아무리 좋은 향기도 뒤섞여 버리고, 부페 식당에 가면 진짜 그 집이 뭘 잘하는지 모르는 것 처럼 말이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아껴 먹듯 하루에 한 두 챕터만 읽어 나가기로 했다.

<마흔을 위한 치유의 미술관>을 지은 윤현희 교수님의 책은 처음 읽는다. 그림에서 마음을 읽는 임상심리학자가 쓴 글이라 미술과 인간의 삶을 보는 시선이 따뜻하다. 이 분 책들도 다 읽어 봐야지. 원래 좋아했던 작가들보다 잘 몰랐던 화가들의 삶과 미술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다. 몬드리안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나는 추상화보다는 구상화를 더 좋아한다. 그래서 단순히 선 몇 줄 그어 놓은 그림이 무슨 의미인가 싶었고 미술의 발전과정에서 이 부분이 제일 이해가 안 되었다. 클래식의 현대음악 파트처럼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 책에서 마주한 <달빛 아래 헤인강의 풍차>를 보았다. 몬드리안이 1903년 그린 그림이다.

몬드리안이 네덜란드 사람이었구나. 1872년 칼뱅파 기독교 학교의 교장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정서적으로도 편치 않은 상태에서 내성적인 청년으로 자라났다. 몸이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두 살 많은 누나가 집안일을 대신했고 그 역시 누나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았다.


꽃을 그린 정물화, 수채화는 그의 주요 수입원이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풍경을 그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 삶의 불안정성과 혼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물질적인 단순함과 감정을 배제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p.156 조형이나 선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은 폴 세잔의 그림을 만나며 곧 형태의 해체와 비움을 통한 정화의 미학으로 발전했다.


세잔이 1907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연 전시회에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 모든 형태를 미분화 시킨 세잔의 그림! 피카소는 이를 입방체를 통해 구현했다면 몬드리안은 선으로 표현한거다.


구도자적인 그의 삶과 '신지학'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도 재미있다.


p.157~8 무절제한 본능이 분출되며 일으킨 세상의 소용돌이를 극복하려면 이성적 사고와 고행을 통해 우주의 근본과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니멀리즘, 모더니즘의 표상, 진실의 격자 공간은 결국 최소한의 시각적 회로만을 활성하여 뇌의 다른 영역이 쉴 수 있도록 만든다.


1919 년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마흔을 앞두고 파리로 거처를 옮긴 그는 몽파르나스역 근처에 스튜디오를 차린다.


p.160 자신의 미학적 논리를 구현한 공간이자 세상을 구하기 위한 그만의 미술을 탄생시키는 구도적 공간이었다.

이후 런던으로 또 뉴욕으로 자신의 슈필라움을 계속 옮겨 다닌다. 여기에는 2차대전이라는 외부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낯선 공간은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p.162 뉴욕에서 접한 즉흥성과 자유로움을 향한 몬드리안의 사랑은 결국 그가 질서와 균형에 대한 강박을 극복하게 하고 완벽한 자유와 해방을 선사한다. 몬드리안이 1914년 그린 <브로드웨이 부기우기>에서 엄격했던 그의 검은색 선들은 원색으로 반짝이는 모자이크의 띠가 되었다.

언제나 삼원색의 격자 무늬만으로 알고 있던 그의 그림에서 풍경화를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은 참 컸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몬드리안의 시그니쳐 화풍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게되는 그 과정에서 '적정 거리의 미학'을 뽑아낸 작가의 시선에 경탄했다. 사실 이게 포인트다.

p.150

적정거리가 주는 안정과 균형은 서로를 존중하는 예의,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는 자기 통제의 힘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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