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늘 패딩말고 코트입고 오길 잘했다.
"우리 교감님이랑 같은 학교 나오셨네. 하긴 연배가 달라 서로 모르겠네요. 제가 교장입니다. 우리 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여기 민원도 없고 아주 좋아요."
어제 부임 인사를 드리러 간 학교 교무실, 교무 부장 자리에 앉아 계셔서 상상도 못했던 너무나 젊은 남자 선생님께서 호방하게 웃으며 말씀하신다. 아니, 저렇게 젊으신 분이? 당연히 교무부장님인 줄 알았어요! 교장실이 아니라 왜 여기 앉아 계신 거냐 여쭤봤더니 교장실이 공사 중이라고 잠시 교무실에 계신다고 하셨다.
"저 삼일 째 한 방에서 같이 근무하잖아요. (웃음) 그런데 우리 교장님 좋은 분이세요."
나를 교감실로 바래다주시려고 교무실을 나와 복도를 향하던 교무행정사 선생님이 멋쩍게 웃으며 말씀하신다. 사회 전공의 교장선생님은 빠른 어투, 엄청난 음량의 소유자셨다. 말씀을 하실 때마다 배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직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나와 똑같은 에니어그램 '장형' 같았다. 마음에 쏙 든다.
신기하게도 여기는 교감선생님이 근무하시는 교감실은 따로 있었다. 예전 학교 보건실과 똑같은 사이즈였다. 교장선생님은 목소리가 우렁찬 관우와 장비의 기상이 느껴졌다면 교감선생님은 뭐랄까 유비와 제갈공명의 분위기가 연상되는 여자분이었다.
발령 인사를 드리러 가면 보통 교무실에서 차를 한잔 종이컵에 주시며 개인 신상에 관한 서류를 작성하고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후 교감선생님을 뵈러 간다. 이제 오늘의 진짜 목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전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다 왔는지, 나이스 인사기록부 속에 부장 경력은 있는지, 대학원 전공은 뭔지, 승진 가산점이 있는지 등등. 두근두근 떨리는 이 시간은 올 한 해 내가 어떤 업무, 몇 학년을 담당하게 되는지 희망 조사를 하는 순간이다.
교감선생님 역시 대봉투에 담긴 나의 인사 기록을 훑으시며 나랑 동문인 걸 언급하신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뚫어질 듯 보신다. 나도 덩달아 자세히 그분을 마주 보았다. 집히는 부분이 있었다. 악, 혹시?
"나한테 미술 배우지 않았어요?"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교수님!"
그랬다. 그분은 미술교육시간에 한 학기를 뵈었던 미술 교수님이셨다. 세월의 흔적이 남긴 얼굴도 얼굴이었지만 목소리와 어투가 옛 기억을 소환했다.
"저 아직도 아이즈너 생각나요!"
아,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대학교 미술 시간으로 타임슬립을 떠난 느낌이었다. 늘 내가 앉던 그 자리, 출석을 부르시는 교수님, 과제로 해가던 아동화 분석, 모의수업 등등.그 다음부터 20분간은 교감대 교사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 모드 토크였다. 신기하게 내가 듣던 수업이 마지막 대학 강의였다고 한다. 우리를 가르치시던 그 시기 이후 출산과 육아때문에 더 이상 대학에 출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본인이 혹시나 성적 나쁘게 주저 않았냐고 물어보시는 얼굴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꿈같던 이야기를 하다가 현타가 왔다. 우리 둘 다 오늘의 만남은 학년 희망 조사서를 작성하는 것이라는 걸 자각하고는 목소리와 눈빛을 재정비했다. 그 학교에는 업무는 모두 부장들이 나눠하고 일반 교사는 자기 학급만 관리하면 된다고 한다. 학년은 지금 두 자리가 비었는데 내게 특별한 선호가 있냐고 물으신다. 고민하다가 대답을 했더니 밝게 웃으시며
"사실 선생님 전에 오신 분이 1학년 안 해보셨다고 6학년을 쓰셨어요. 다행이네요. "
이렇게 나는 1학년에 당첨되었다. 오늘 패딩 말고 코트입고 가기를 진짜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