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선수의 선택이 불러온 '배신자' 논란의 역사적 배경
지난 9월, 아일랜드 Ireland 수도 더블린 Dublin 에서 열린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축구 대표팀 간 승부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데클란 라이스 Declan Rice 와 잭 그릴리쉬 Jack Grealish 가 각각 한 골씩을 기록하며 잉글랜드가 2:0 승리를 거뒀는데요. 경기 시작 전부터 유독 아일랜드 홈 팬들의 거센 야유를 받았던 두 선수가 마침 두 골을 합작하며 실력으로 복수를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일랜드 팬들은 왜 이 두 선수에게 집중적으로 야유를 보냈던 걸까요?
라이스와 그릴리쉬는 영국 국적이지만, 조부모가 아일랜드계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대표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둘 모두 잉글랜드 대표팀을 택했습니다. 아일랜드 팬들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겠지만, 이들의 선택을 이해할 여지는 충분해 보입니다. 2024년 기준 잉글랜드는 피파 랭킹 4위의 강팀인 반면, 아일랜드는 58위로 비교적 약팀으로 분류되니까요.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고려할 때 잉글랜드 대표팀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일랜드 팬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과거 라이스와 그릴리쉬는 아일랜드 청소년 대표팀 소속으로 국제무대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죠. 성인이 된 그들은 아일랜드를 버리고 잉글랜드 대표팀을 선택했고, 아일랜드 팬들에게 커다란 배신감을 안겼습니다. 이후 아일랜드 팬들은 이들을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이번 A매치에서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 축구팬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제삼자인 우리에겐 다소 가혹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인의 해묵은 반영 反英 감정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민족과 종교는 물론이고 언어도 다른, 서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영국은 무려 800여 년 간 아일랜드를 지배하며 착취했습니다. 특히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감자 대기근(1845-1852)’과 ‘아일랜드 내전(1922-1923)’으로 아일랜드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무자비한 수탈로 감자 외에 이렇다 할 먹거리조차 없었던 아일랜드인에게 19세기 중반 전 유럽에 퍼진 감자역병 Potato Blight 은 커다란 재난이었습니다. 인구의 대부분이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아일랜드인들은 이 역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의 감자역병에 무대응으로 일관하였고, 결국 역사에 남을 대참사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1845년부터 1852년까지 발생한 감자 대기근으로 당시 아일랜드 인구 8백만 명 중 백만여 명이 굶어 죽었고, 다른 백만여 명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하며 아일랜드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습니다. 2024년 기준 아일랜드 인구는 520여만 명으로, 현재까지도 감자 대기근 이전의 인구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국군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아일랜드는 집요하게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의 강한 저항에 지친 영국은 '영국-아일랜드 조약 Anglo-Irish Treaty'을 통해 ‘아일랜드 자유국 Irish Free State'이라는 영국 자치령을 아일랜드에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점진적 독립을 주장하는 조약 찬성파와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반대파의 분열을 야기했고, 결국 아일랜드 내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내전의 피해는 극심했습니다. 내전이 벌어진 1년여간 찬성파와 반대파를 통틀어 3,000~5,000여 명이 사망했으며, 민간인도 1,000~3,000여 명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이 조약으로 인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 Northern Ireland 는 영구 분단되었습니다.
라이스와 그릴리쉬에 대한 아일랜드 팬들의 감정은 단순한 과민 반응 정도로 치부하기 어려우며, 그 이면에는 깊은 역사적 맥락과 복잡한 감정이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게 되면, 두 선수의 선택과 활약이 왜 이렇게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