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너무 어렸을 때부터 헤어짐의 아픔을 달고 살았다. 바쁜 엄마는 나에게 젖도 사랑도 관심도 줄 시간이 없었기에 일찍부터 남과의 관계를 맺어왔다. 세상에 나만 존재하는 듯이 사랑해 주시던 유모는 아들이 군에서 제대해 돌아오자 나에게 주던 마음의 반을 아들에게 주었고 그 아들이 결혼을 해 낳은 애기는 반쯤 남았던 나머지 작은 마음까지 모두 다 앗아가 버렸다. 그리곤 내가 5살이 되던 해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리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자기 친여동생보다 나를 더 예뻐하는 옆집 언니에게 정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는 결혼과 함께 훌쩍 몸보다도 더 멀리 그의 마음이 떠나버렸다.
중고등학생 때는 많은 미국인 군인과 선교사, 신부 수녀님들과 친했다. 그들은 짧으면 1-2년, 길면 2-3년이 지나면 한국에서의 일을 마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곤 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떠나갈 때마다 마음의 한쪽을 잃은 양 아파하고 외로워했던 적도 있다. 왜 떠나야 할까? 왜 헤어져야 할까? 미국은, 외국은 어디기에 그들은 나에게 등을 보인채 환하게 웃으며 그쪽만을 바라보고 떠나는 것일까? 가끔 생소해 보이는 외국 우표들이 더덕더덕 붙어있는 편지봉투를 손에 받아 들면 하물며 사람도 아닌 종이조각도 바다를 건너는데 왜 나는 갈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편지를 질투하곤 했다.
어느 날 늦은 밤 TV에서 하는 음악프로그램을 봤다. 프로그램에 대한 기억은 생생치 않지만 KBS의 수석 지휘자인 사람이 음악을 소개하고 중간중간 좋은 말을 해주는 프로였다. 한 번은 썼던 모자를 벗어 가슴에 대며 "헤어졌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헤어짐은 만남과 함께 그 사람과 나눈 사랑을 완성시키는 일부입니다"라고 했다. 맞다! 모든 것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고 끝이 있어야 마무리가 되는 것이란 말에 공감을 했고 어려서부터 수많은 아픈 헤어짐을 되돌아보며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소중한 인연을 완성하고 좋았던 추억을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 헤어짐의 달인이 되었다.
늘 강의중심으로 한국여행을 하던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계획을 하고 약속을 해서 만나곤 했다. 계획으로 만나는 사람들도 그들의 실제 행동을 보이 것이 아니라 그들이 표현해 내는 말로만 그들의 행동을 가늠할 뿐이다. 또한 강의는 아무래도 일방적이다. 아무리 좋은 강의를 한다고 해도 그 강의내용에 따른 사람들의 변화는 절대로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두 달이 넘게 길게 있다 보니 이곳저곳을 혼자 다니게 되고 생각지도 않게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식당을 가고, 가게를 가고, 택시를 타고, 서비스를 받으며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살고 있는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국회도 가고 여의도 광장, 한강 강변공원과 크루즈 선착장도 갔다. 여의도는 점심 장사만 하는 곳이 많아 아무도 다니지 않는 복도를 지나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의 모든 식당이 셀프서비스인데 내가 자리를 잡자 일하시는 할머니가 수저며 물이며 반찬을 가져다주셨다. 옛날의 여유와 정감이 떠올라 좋았다. 사장님은 주문한 음식을 직접 가져다주시며 내 휠체어를 보며 좋아 보인다며 대화를 던졌다. 새로운 시각의 칭찬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이렇게 단골이 되는 거야"라며 다시 오라고 했다.
장콜을 타고 아주 가까운 곳을 가야 했는데 기사님이 말을 붙인다. 장콜 노조에서 일을 하신다고 해 반가움이 들어 며칠 후 노동대학에서 강의를 해야 하는데 처음 맞는 대상이라 걱정이라고 했다. 노동조합 간부로 일을 하는데 어느 날 강사가 못 오는 바람에 대강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궁금해서 어떤 내용인지 물었다. 신이 나신 듯 열심히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는 첫 질문으로 “여러분 행복하세요?”라고 물었단다. 깜짝 놀라며 나의 강의도 바로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려서 동생에게만 좋은 것을 주는 것에 불만이 있던 자신을 아버지가 하루 밖으로 데리고 나가 산책을 하며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들이 과외하러 가기 싫다고 해서 그만두라고 했고 원하는 것을 하라고 격려했고 지금은 커서 다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한다. 훌륭한 아버지를 가진 그 기사님은 자신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쟁적인 자녀교육이 나쁘다면서도 경쟁을 안 시킬 수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자녀를 허용과 칭찬으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행복했다.
배가 고파 찾아들어간 속초의 어느 자그마한 식당의 주인은 요리, 서빙, 카운터, 설거지등 모든 식당일을 혼자 한다. 옆 테이블에서 밥 한 공기를 추가하자 무료라며 그냥 드린다. 아직도 옛 풍부한 정서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식사가 끝나자 커피도 타주고 병에 가지고 가도록 배려를 해준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들으니 삶에 대한 도가 티인 사람이다. 깨알 홍보도 잊지 않는다. 여행지라서 대부분이 여행객이지만 그들은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식당을 찾는다고 했다. 나도 역시 사흘동안 홀리듯 그 집을 드나들었다.
특정한 갈 곳을 정하지 않고 해안선을 따라 있는 구도로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한 전통시장에 다 달았다. 여름한철 장사를 하는 해안도시라 대부분이 문을 닫고 있었다. 한 과일가게에서 토종 포도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아저씨는 내 행색에서 외국냄새를 맡으셨는지 어디에서 공부를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분도 유학파인가 싶어 "어디서 공부하셨어요?"하고 물었더니 자신은 꿈만 있었다고 한다. 나는 어떤 분야의 공부를 했느냐고 물었고 머뭇대던 그 아저씨는 "철학"이라고 했다.
나는 "너무 멋있어요!"라고 외쳤다. 철학을 하시는 과일 아저씨! 그분과 나는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분은 노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장자를 좋아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오가며 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기본학문을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공감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유학의 꿈을 접은 그는 철학적 관심을 요즘은 민속신앙에 관심이 있다며 다음에 다시 한번 와서 길게 이야기를 하자고 하고 헤어졌다. 맞다! 꿈은 접고 현실 속에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이 함께 살고 있다.
그동안 나는 한국의 기둥이 되고 있는 서민의 삶을 모르고 나의 좁은 인맥에 의한 사람들만을 만나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한국의 정서를 새로 만나며 현대화가 이루어지면서도 잊히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우리나라의 정과 여유를 가지고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남과 비교하며 경쟁만 하는 사람들이 사는 것이 아님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 헤어짐의 달인이라 자칭하던 나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만나 짧은 인연의 대화를 하고 헤어지기 힘들어했다. 그들도 나에게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간절함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