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봄- (1) 아빠

by 하정희

올해 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화제가 되었을 때, 각박한 세상 아래 드라마 정도는 따뜻한 내용 위주로 찾아보길 원하는 나도 사실 쉽게 '폭싹' 대열에 참여했었다.


많은 이들이 드라마 속 아이유 부모의 자식을 향한 언어와 헌신의 자리에 열광하였고 나 역시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쏟았지만, 나는 그 드라마 속 부모의 언어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드라마 거리가 될 만큼이나 화제가 된 그들의 언어는, 내 부모께서 나를 뒷받침 해 오신 그 언어-자식의 선택을 믿어 주고, 본인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며, 그렇게 성장한 자식에게 알아서 잘 커 주어 고맙다 이야기하시던 그들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모의 그런 언어는, 자식이 인생 가운데 어떤 형태로건 높음이 있고 낮음을 지나는 동안 마음을 꼬옥 지킬 수 있게 하는 정서의 기반이 된다.


내 앞에 급작스레 밀려 들던 어찌할 바 모를 상황들을 두고 미처 분에 못 이겨했던 어느 날, 아빠는 여든이 넘어서도 여전한 그 낭랑하고 굵은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로 예의 그 언어가 담긴 대화를 건네어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재차 생각하게 해 주었다.

여느 때처럼 아침마다 출근하는 운전 길에 짧게 나눈 그날의 통화로, 그래 역시 사람이라면 한 틈 쉬며 때를 기다리는 법도 있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해 준 아빠가, 그날 밤 갑자기 천국 문턱을 드나 들었다.



봄이라는 선언이 무색하게 여전히 쌀쌀했던 4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새벽 2시 20분, 아빠에게 급작스런 왼쪽 가슴 통증이 왔다.

처음 맞이하는 종류의 심각한 아픔에 긴급히 부른 119 구급차는 아빠와 보호자인 엄마를 싣고 서울대학교병원 응급실로 갔다(요즘 심심찮게 보도되는 대형 병원 응급실 상황을 비추어 보면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통증 시작 한시간 내에 혈압강하제, 진통제 등 처치로 190까지 치솟았던 혈압을 진정시킨 뒤 심혈관CT 검사로 알게 된 통증의 원인은 '하행 흉부 대동맥류'였다. 어떤 이유에서건 대동맥 혈류가 원활하지 못해 대동맥이 크게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지기 직전인 상태가 된 것을 말한다.


아침 7시에서야 엄마가 '정희야, 놀라지 말고 들어' 하며 걸어온 전화에 이미 나는 충분히 놀라 있었고, 눈물콧물 바람 하며 뛰어간 응급실에서 아빠는 허옇게 센 까치 머리를 하고 양 팔에 주렁주렁 라인을 달고도 나를 만날 때마다 보이는 그 반가운 눈을 하고서 나를 다정히 맞았다. 일하는 사람이자 애들 엄마인 딸에게 전화를 했다고 엄마를 타박하셨다기에, 하나 있는 딸한테 이런 일을 알리지 않으면 이젠 내가 늙은 아빠를 엄청 혼내키겠다 으름장을 놓았다.

내 옆에 온 응급실 담당의는, 조심스럽게 '흉부외과 전문의 소견이 정확히 나와야 알겠지만, 아마도 수술은 안해도 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관찰은 해야 한다'며 중환자실은 보호자가 상주할 수 없으니 집으로 가라 했다.


조금은 안심하는 마음으로 엄마는 수유리로 보내드리고 나는 다시 삼성역 회사로 차를 몰고 돌아오던 중, 엄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심장혈관흉부외과에서 전화가 오기를, 그 다음날 바로 수술을 해야 하니 오후에 병원으로 돌아와 집도의 설명을 들으라는 것.


엄마를 모시고 들어간 중환자실 한 쪽에서, CT이미지를 차근히 보여주며 젊은 교수는 생전 처음 처음 들어 놀랍고 가슴이 쿵쾅거릴 만한 이야기를 또박또박 꺼내 놓았다.

1) 대동맥 혈관이 부풀다 못해 견디지 못할 만큼 혈관벽 한 쪽이 극도로 얇아져 위험한 상태이고, 2) 밤사이 응급실 와서 처치를 하지 않아 대동맥이 터졌으면 급사하셨을 것이며, 3) 그 대동맥을 인공혈관으로 바꾸어 주는 수술을 할 것인데, 4) 인공혈관을 꿰매어 붙이면 함께 견디어 주어야 할 아래위 대동맥 부분이 이미지 상으로는 멍이 들어있는 상태로 보인다. 5) 거기에 관상동맥(심장에 피를 공급하는 동맥)도 상당 부분 막혀 있어 보여 일단 열어서 보고 스텐트 시술까지 해야 할 수 있다. 6) 따라서 매우 어려운 수술이 될 것으로 보이지만 수술 자체는 우리가 잘 해주겠다...


의사의 입에서 선명하게 나오는 '급사'라는 단어는 생경하고도 공포스러웠다. 그래도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기 위해 CT에 까막눈인 보호자들에게 차근히 시간을 써 설명하는 그가 고마웠다.

고마운 김에, 그리고 상황 파악은 명확히 해야 했기에 눈물은 그렁그렁, 아이처럼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한 번 더 물었다. '수술은 꼭 해야 하는 거지요?'


그 질문에 아마도 30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교수는 무서운 표현들을 또다시 또박또박 이어갔다.

1) 고령이시라 본인이나 보호자가 수술 안 받겠다 결정하면 의사가 수술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2) 이 상태면 일주일 안에 또 일이 터질 것이고 그 때 터지면 역시 '급사'하신다, 3) 80대 중반이신 것에 비해 모폴로지(morphology: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그들만의 용어인데.. 환자의 겉모습, 대략 느껴지는 체력의 정도, 뼈대 건강 등을 의미)가 좋고 여타 지표도 나쁘지 않아 수술하실만 해서 권하는 것이다.


이만큼만 해도 충분히 무서운데 그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4) 내일 오후 1시 수술로 잡혀 있지만, 오늘 밤 혈관이 결국 터지는 등의 일이 생기면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하고, 사실 언제 그 일이 생겨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 참고해라..


여러 충격적인 상황 설명 가운데에서도, '급사'라는 단어 정도는 다른 말로 돌려 말할 수는 없었을까 야속할 지경이었으나, 사실 다른 단어를 고른들 그 충격이 달라질까 싶기도 했다.



보호자로서 해야 하는 수술 동의를 마친 뒤 아빠에게 설명을 하고선 '아빠가 그래도 여러 환자 보아 온 이 병원이 인정한 얼평(얼굴 평가) 상위권이야' 하고 농을 쳤다.

눈물에 절은 도 받아 들이고, 진통제 후에는 아픈거 하나 없다며 나름 씩씩해 보이던 아빠, 그리고 평소에도 나이 들어 노쇠해 지는 모든 경험에 의연하고 철학적이셨던 아빠도 심장 수술 앞에서는 두려우셨던지 옅은 한숨과 함께 '아 이제 내가 갈빗대를 다 자르는구나' 한 마디를 하셨다.

엄마와 나 역시 아빠의 갈빗대 이야기를 듣고서야 개흉수술에 대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사실 정신은 이미 아득해 있었으나, 그게 더 아득해 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래도 당사자 앞에서 짐짓 희망적인 척은 해 보고자, '아무나 못하는 경험을 그렇게 하고 싶으셨어? 85세에 별 걸 다 하시네. 이제 책 하나 이걸로 쓰시면 되겠네' 하는 말을 건네는 억지 용기와 함께, 다음 날 수술 전 면회 시간을 기약하며 아빠를 중환자실에 홀로 남겨두고 나왔다.


엄마와 함께 아빠 쪽 침상을 돌아보며 손 흔들고 나오는데, 아빠한테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흔드는 손이, 인사하는 눈이, 마지막이 될까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