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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장복 Oct 28. 2024

022 10월 26일 밤 1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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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


10월 26일


유명배우가 전시한다고?


인스타에 떠도는 배우 아무개의 그림을 봤다. 얼핏 발랄하게 보인다. 그 정도다. 취향의 차이라면 관심을 끄면 되고 수준의 차이라면 이분법적 차별이 되지 않도록 근거를 대야 하는데 그러고 싶진 않다. 헌데 전시 장소가 학고재다. 보통 미술관에 들어설 때 집에 걸어둘 만한 그림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는다. 학고재라는 메이저 갤러리도 마찬가지다. 취향에 앞서 양식이 될만한 무엇을 관람자는 기대한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위로를 주나? 새로운가? 성급하게 말해서 누굴 위로할 만한 솜씨에 못 미치며, 그닥 새롭지 않다.

위로가 되려면 누구나에게 내면화된 일반적인 수준의 미의식에 부응해야 한다. 쉬운 예로 고전이 되어버린 작품들이 그렇다. 인상주의 전시를 가리켜 당시에는 노약자와 임산부는 피하라고 했다지만 지금은 어디 그런가. 잘 그렸다! 예쁘다! 멋지다! 등등 외마디의 감탄사를 유발하는, 이미 익숙해진 그림이 종종 새로움의 가치에 앞서 위로가 된다. 그러려면 아카데미의 권위에 힘입어 공식화된 미의 수준에 충분히 이르러야 하는데 그만한 숙련도가 필요하다, 그런가?


새로운가? 맹목적인 숙련은 '기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진부한 매너리즘의 기계적 생산은 필연적으로 상품의 생산을 닮는다. 명품이 작품 같은 솜씨를 보여준다 해도 상품이란 사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는, 미래를 여는 척후병으로서 작가는 새로움을 여는 산통을 피해 갈 수 없다. 새로움은 새롭지 않은 것에 저항한다. 파괴와 전복, 교란, 혼돈과 날것 등등의 단어와 어울리며 배반과 부정을 일삼는다. 하여간에 저항을 통한 미래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나?


해골에 수백 개의 보석을 박아놓는 따위의 물리적인 스케일로 압도하는 전위 작가들과 견주려는 생각은 없다. 그만한 물량을 동원하려면 다분히 권력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와 거리를 두면 된다. 허나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평정심과 지혜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써 그리기가 곧 자기 해방일 수 있는 새로움의 수준이 있다. 천 개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떠오를 수 있듯이 타고난 본성을 좇을 수 있는 저마다의 통로가 있다. 기왕에 유명한 배우가 그런 자유를 내보일 때 기꺼이 박수를 보내련다.


덧붙여 애초 그림 그리는 유명배우를 힐난하려고 글을 시작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었는데, 써놓고 보니 부조리한 작금의 어지러운 풍토와 작가의 모호한 정체성을 환기시키려는 절망 어린 자기반성이 행간에 엿보인다. 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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