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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2. 2024

Ep10 오스트레일리알로 워홀러스

황금보다 황금빛 노을

#번버리(Bunbery)


 퍼스에서 한창을 무기력하게 게임만 하면서 보내던 날이었다. 우연히 번버리 근처에 있는 감자, 당근 농장과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퍼스의 한 공장에서도 연락이 왔다. 광석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돌을 종류별로 분류만 하면 되었고, 시급도 제법 높았다. 이미 많은 워홀러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감자 당근 농장에는 직원이 전부 호주 사람이었다. 내가 간다면 한국 사람은 나 하나뿐이게 되는 것이었다. 단지 한국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곳의 유일한 외국인이자 이방인이 되는 샘이었다. 일터에서 철저하게 나 혼자 외국인이 된다는 점이 영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철저히 이방인으로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맘때 한국인들과의 연속적인 만남에서 그들의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서에서 조금 멀어지고 싶었다. 한국인을 마주치기 싫었다.


 퍼스를 떠났다. 번버리는 퍼스에서 남쪽으로 차로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울과 대전 거리다. 퍼스에서 북쪽으로 2시간 거리인 진진에서 일했던 나는 남쪽으로 2시간 거리인 곳에서 일하게 됐다.


 검트리로 번버리에서 제일 싼 집을 알아봤다. 집주인은 네팔 사람이었다. 간호사 일을 하는 그녀는 나보다 10살 정도 많은 듯했다. 집에 도착하니 거실 한 편에 생소한 불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녀는 네팔의 한 종교라고 얘기해 줬다. 그러면서 불교와 힌두교가 적당히 섞였다고 했다. 


 나는 침대가 두 개가 있는 방을 썼다. 내가 갔을 때 룸메이트가 없어서 방을 나 혼자 썼다. 그리고 그 집을 나가게 될 때까지 죽 혼자 쒔다. 그때가 유일하게 나만의 공간에서 사적인 삶을 영위한 기간이었다. 그리고 그 집은 호주 치고 인터넷이 정말 빨랐다. 호주에 오고 나서 인터넷은 포기하고 살았었다. 시티에서도 빠른 인터넷을 쓰려면 비용을 상당히 지불해야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는 집의 와이파이를 무제한으로 쓰게 해 줬다.


 농장과 집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었다. 진진에서 일할 때는 농장에 일하는 워홀러들이 워낙 많아 돌아가면서 차를 얻어 타고 다녔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심정이었다. 차가 있으면 단순히 유지비 외에도 돈이 나갈 것 같았다. 쉬는 날이면 차를 타고 호주의 아름다운 천해 자연환경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 힘들거라 예상했다. 이번에는 구입해야 했다. 마땅히 셰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차를 구입할 때까지 2~3일 간 농장에 있는 한 직원(이하 올리버)에게 픽업을 부탁했다. 올리버는 나와 동갑인 호주 사람이었다.


 차를 구입하는 날이었다. 검트리로 번버리 지역에서 가장 싸게 파는 차량을 찾았다. 1995년 산 빨간색 포드 경차. 어차피 6개월 정도만 이용할 차가 필요했으므로 비싼 차가 필요 없었다. 그리고 호주 생활에서 목표의식과 열정을 어느 정도 상실한 나는 차를 구마 하는 데 있어 그리 꼼꼼하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날 밤 현금 1000불을 뽑아 차를 판매하는 사람을 만나러 갔다. 앳돼 보이는 호주 청년이 나와 나를 맞아 줬다. 무척이나 밝은 청년이었다. 그는 나한테 차량 상태 확인 해 보고 싶거나 차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전혀 없다고 하고, 바로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혹시 모르니 나와 함께 마을 한 바퀴 돌아보자고 했다. 차를 끌고 한 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차의 몇몇 하자에 대해서도 알려 줬다. 그는 호주사람 특유의 유쾌함이 잘 묻어있는 친구였다. 운전하던 도중 그 친구가 기분이 좋았는지 먼저 차량 가격을 깎아 주었다. 나는 1000불도 괜찮았는데 무려 200불이나 깎아 줬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차를 800불(당시 환율로 약 70만 원)에 구입하게 됐다.


 차를 끌고 집에 오는 길이 묘했다. 아무리 잠시 사용할 똥차를 구입했다지만 인생 첫 차라고 생각하니 금세 정이 붙었다. 이름을 붙여 주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다음날 차를 타고 출근할 아침이 기다려졌다.


  다음날 차를 타고 출근하니 농장 직원들이 반겨줬다. 똥차여도 남자들 사이에서 차를 뽑으면 일단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은 한국이든 호주든 비슷했다. 올리버는 잠시 내 차를 봐주겠다면서 차 후드를 열었다. 이것저것 만지던 올리버는 엔진오일만 채우면 된다면서 차 구입가를 물어봤다. 올리버는 가격을 듣더니 아주 잘 샀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석양이 사선으로 내리고 있었다. 뻥 뚫린 도로 위로 금빛 물결이 물들었다. 이를 보니 들뜬 마음과 함께 페달을 밟았다. 똥차여서 가속이 아주 느렸다. 그리고 시속 100km에 이를 때쯤 차체가 덜덜 거렸다. 그래도 그 차가 좋았다. 내 차라는 생각에 뭐든 예뻐 보였다. 차한테는 ‘덜덜이’라고 이름을 붙여줬다. 붕붕이라고 이름을 지어주려다가 너무 흔한 이름일 것 같아서 덜덜이라고 불렀다. 농장에 있는 호주 사람들에게도 내 차 이름과 작명 이유를 알려줬다.


#감자, 당근 나라 주민들


 농장에 나 말고 Ted가 한 명 더 들어왔다. 내가 입사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나이는 50은 되어 보이는 호주 아저씨였다. 나처럼 Ted라는 이름을 만든 이방인이 아닌 네이티브 Ted를 처음 만나게 됐다. 농장에서 주로 올리버와 Ted 아저씨랑 이야기를 했다. 각별히 친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중 올리버와 Ted랑 그나마 친해졌다. 그리고 신경쇠약에 걸린 인종 차별자(이하 토마스)가 한 명 있었다. 우리 모두 그를 별로 안 좋아했다.


 토마스는 항상 인상 쓰고 있었고, 짜증 내는 말로 이야기를 했다. 직접적으로 인종차별적 말은 안 했지만 토마스는 나와 대화할 때랑 호주 사람들과 대화할 때의 태도가 무척이나 달랐다. 나와 대화할 때는 짜증 섞인 말투와 높아지는 언성은 항상 기본이었다. 말을 하다가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짜증을 내면서 말을 했다. 하지만 이미 호주 생활 1년 반이 넘은 내겐 전혀 심리적 타격이 없었다. 그동안 교묘하게 인종차별을 하는 사람을 오히려 더 많이 만났었다. 대처하기도 애매하고, 상대방의 교묘한 차별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기엔 영어가 부담 됐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 재밌었다.(길거리에서 마주친 주정뱅이나 십 대 애들을 제외하곤) 그전에 일하던 아시아인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나는 네 뜻대로 안 움직여 줄게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다가올 일이 기대됐다.


 처음엔 토마스의 헛소리를 그냥 웃어넘겼다. 일단 농장일에 익숙해져야 했다.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고, 농장의 시스템을 파악할 때까지만 참기로 했다. 어느 정도 농장에 적응했을 쯤이었다. 그날도 토마스가 아침부터 잔뜩 화를 내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을 했다. 토마스의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어느새 토마스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다. 더 이상 흥분 시키면 안 될 것 같아 그제야 알아들었다고 했다. 또 하루는 농장 직원들과 다 같이 서서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을 때였다. 토마스가 반대편에서 걸어오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앞에서 발이 꼬여 넘어졌다. 그 넘어지는 꼴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넘어졌다. 이불킥과 흑역사 그 자체였다. 나를 비롯한 모든 농장 직원들이 말 그대로 빵 터졌다. 웃는 내 얼굴을 보고 더 화가 난 듯했다. 평소라면 괜한 트집을 잡으며 내게 뭐라 했을 터였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직원들이 같이 웃고 있으니 나만 콕 집어서 뭐라고 할 수 없었다. 토마스는 민망했는지 나를 잠깐 노려보곤 그 자리를 떴다. 걸어가는 그 의 뒷모습에서 터질 듯이 붉어진 얼굴이 보였고, 마구 내뱉은 욕설이 들려왔다. 


 하루는 Ted 아저씨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날은 평소와 달리 토마스가 우리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Ted 아저씨가 일 끝나고 집에 가서 주로 뭐 하냐고 물어봤다. 나는 씻고 헬스장 가서 운동한다고 했다. 그러자 마자 토마스는 나한테 운동을 해선 안된다고 했다. 농장에서 써야 할 에너지를 운동으로 낭비해선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어서 자기는 일 끝나면 피곤해서 집에 가서 자기 바쁘다며 운동할 체력이 있는 것을 보니 일을 제대로 안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되받아쳤다.


 “No wonder you became such a fatass”(네가 왜 뚱뚱한지 알겠네)


 Ted 아저씨가 놀란 표정과 함께 껄껄 웃었다. 토마스는 엄청 흥분해서 나한테 힘껏 쏘아붙였다.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실 욕설이 섞어가며 빨리 말해 알아듣지 못했다. 토마스는 씩씩 거리며 멀어졌다. Ted 아저씨는 내게 잘했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날 이후 토마스는 내게 업무상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Ted 아저씨는 젊었을 때 군대를 다녀왔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나를 좋아했다. 남자가 군대에서 고생도 하고, 총도 싸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면서 나한테 진정한 남자라고 말해 줬다. 한국 아저씨들이나 말할 것 같은 이야기를 서양 아저씨한테 들으니 신기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말을 알려줬다. 


 “No man, if you ain’t in the army”(군대 안 갔다 오면 남자도 아니지)


 Ted 아저씨는 격하게 동의하면서 좋아했다. 그러면서 아저씨가 군대에서 주로 사용했던 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곱창에 소주 한잔 먹으면서 시작할 것 같은 군대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군대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창 피 끓던 시절, 자신이 겪은 모험담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당연한 것 같았다.


 Ted 아저씨도 한국 군대 이야기를 재밌어했다. 특히 겨울철 이야기를 재밌어했다. 호주 대부분의 지역에서 눈을 보기 힘들다. 그리고 국토가 대부분 평지이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부대가 산에 있고, 혹한기 훈련과 눈을 ‘하얀 쓰레기’라고 부르는 한국 군대 문화를 재밌어했다. 게다가 Ted 아저씨가 군인일 때 맡았던 보직이 나와 유사했다. 아저씨가 직접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이었으면 나는 그 무기를 정비하는 보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관리했던 무기가 같은 무기였다.


 올리버는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집으로 Ted 아저씨가 들어가 살았다. 올리버는 늘 배시시 웃는 친구였다. 튀어나온 배 때문에 늘 입고 있는 옷이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올리버의 아랫배는 뜨거운 호주의 자외선을 늘 받았다. 나는 그런 올리버가 긍정적이고 유쾌한 사람 같았다. 그런 올리버가 하루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일하는 도중 집으로 갔다. 다음날 평소와 같이 유쾌한 표정으로 일을 하고 있는 올리버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그는 올리버에게 굽신거리는 자세를 취하며 무언가를 요구했다. 올리버는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올리버 뒤를 쫓아 다디는 그 남자는 이내 농장의 다른 직원들에게 굽신거리는 자세를 취하며 무언가를 요구하고 다녔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게 Ted 아저씨가 다가왔다. 곧이어 Ted 아저씨가 전후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 남자는 올리버 여자친구의 남동생이었다. 마약 중독자로 이미 전과가 있었다. 올리버는 여자친구의 동생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끔 경제적으로 지원도 해 줬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돈을 전부 마약에 탕진했다. 그러면서 달라질 거란 거짓 약속을 해오며 올리버에게 지속적으로 돈을 빌려왔다. 몇 번의 도움에도 달라지지 않자 올리버는 도움의 손길을 끊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 올리버를 괴롭혔다. 그날도 ‘이번만은 진짜’라는 허황된 말과 함께 또 돈을 빌리러 농장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올리버가 거절하자 다른 직원들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이다. 생면부지의 사람한테 올리버의 이름을 팔아가며 돈을 빌리려 했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Ted 아저씨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혹시 나한테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꼭 거절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날은 늘 헤벌쭉 웃었던 올리버의 화난 얼굴을 처음 본 날이었다.


 그날 알았다. 마약 중독자의 삶이 어떤 의미로 얼마나 간절한지. 나보다 어린 그 남자는 얼굴 가죽이 비쩍 말라 있었다. 머리도 듬성듬성 빠져 있었다. 나이 들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탈모가 아닌, 누군가 한 주먹씩 강제로 뜯어낸 것 같았다. 그 퀭한 눈은 기운이 없어 보임과 동시에 광(狂)적인 광휘(光輝)를 내뿜었다.


 다행히 그날 이후 그 남자는 농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올리버는 여느 때와 같이 배시시 웃고 있었다.


#F1 캥거루


 농장에서 일하며 4륜 바이크를 실컷 탔다. 하루 종일 4륜 바이크를 타며 돌아다녔다. 오프로드를 거칠게 질주했을 때의 쾌감은 늘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분비시켰다. 그리고 캥거루들과 오프로드 레이스를 할 때면 더욱 신이 났다.


 아침마다 농장에는 짙은 안개가 가득했다. 눈부신 햇살이 아름다운 호주 하늘에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는 장면은 늘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전에 안개 너머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항상 보였다. 캥거루들이었다. 정확히는 거대하고 징그러운 캥거루가 아닌, 귀여운 왈라비였다. 농장 주변에는 어느 호주 시골과 마찬가지로 왈라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 왈라비들은 아침마다 우리 농장에서 식사를 했다. 그들은 사이좋게 당근을 파먹었다. 고작 몇 마리에 불과한 왈라비들이 차례차례 고개를 숙이며 땅속 작물을 먹는 보습을 보면 모습이 여간 귀여웠다. 한 마리가 주변을 경계하면 다른 왈라비들이 당근을 파 먹었다. 만화에나 나올법한 장면 같았다. 당근 서리범이 많지 않아 농장주도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저 아침에 내쫓기만 하면 됐다.


 나는 바이크를 이용해 캥거루들을 쫓아냈다. 캥거루 가족에게 접근하면, 그들은 소리를 듣고 이미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지만, 나는 캥거루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늘 뒤를 바짝 따라갔다. 그리고 4륜 바이크는 캥거루의 달리기를 따라잡기 충분했다. 도망가는 캥거루를 따라잡으면 어느새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캥거루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와 정면을 번갈아 보며 필사적으로 뛰었다. 나는 그 속도에 맞춰 오토바이를 몰았다. 어떨 때는 마치 만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물론, 그 캥거루는 무서웠을 테지만.) 한 번은 캥거루가 농장 울타리 쪽으로 도망쳤다. 캥거루 입장에서 막다른 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캥거루는 울타리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호주에 있는 동안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캥거루를 자주 봤지만 그때만큼 엄청난 도약을 보진 못했다. 처음 목격한 캥거루의 힘찬 도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놀란 나는 멀어져 가는 캥거루를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뜨겁지 않은 감자


 농장에서 내가 맡은 주된 일은 스프링 쿨러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스프링 쿨러가 작동하는 동안 우비를 입고 작동 안 하는 스프링 쿨러를 정비했다. 쨍쨍한 햇살아래에서 스프링 쿨러를 틀면 금방 무지개가 떴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시원한 빗줄기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은 늘 상쾌했다. 그 무지개와 인공 비 속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상에 들어간 듯했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에 들어가는 느낌이 나를 기분 좋게 가라앉혔다. 우비에 달린 모자를 두드리는 물소리와 풀잎과 흙에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묘하게 편해졌다. 


 스프링 쿨러가 다 돌아가고 나면 스프링 쿨러를 해체했다. 파이프 안에 물이 고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파이프 하나하나를 분리해 그 자리에 그대로 뉘어 놨다. 눕힐 때는 작물이 안 다치게 잘 살펴야 했다. 그리고 다시 스프링 쿨러를 돌려야 할 때면 하나하나 파이프를 다시 연결했다. 매일매일이 데드리프트의 연속이었다.


 농장 주인의 아들이 키우는 개가 있었다. 개의 이름은 Spud(감자)였다. 처음에는 내가 잘 못 들은 줄 알고 우리가 농사짓고 있는 그 스퍼드(Spud)가 맞냐고 물어봤다. 맞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감자 농장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감자라고 지은 샘이다. 스퍼드는 운동량이 엄청나고, 덩치가 큰 개였다. 성격이 온순하면서 활발해 나도 무척 좋아했다. 스퍼드도 나를 잘 따랐다. 문제는 스퍼드가 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내 스프링 쿨러 작업을 자주 방해 했다. 내가 스프링 쿨러 파이프를 연결하거나 해체할 때면 늘 내게 달려왔다. 파이프 연결 및 분리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저 멀리서 덩치 큰 검은 개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 개는 입을 벌린 채 혀를 잔뜩 휘날리며 내게 달려왔다. 얼핏 보면 성격만 착한 동네 바보 같았다. 스퍼드는 내가 파이프를 들 때까지 엎드린 채로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파이프를 들어 올리는 순간 바로 파이프를 입으로 물었다. 그 채로 파이프를 흔들었다. 스퍼드는 그 쇳덩이를 무는 것이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 같다. 영락없이 장난감을 물고 흔들어대는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결국 스퍼드의 주인이 “Damm you Spud. Come here!”라고 소리쳐야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래도 노동 중간에 맛보는 귀여움이 좋았다.


 농장에 들어가자마자 농장 일이 많았다. 감자를 아침 일찍 출하해야 했다. 그 때문에 새벽에 출근했다. 새벽 3시부터 해 뜰 때까지 수확기가 감자를 수확하고, 나는 수확기에 탑승해 감자와 함께 올라오는 돌 따위를 분류했다. 그렇게 수확한 감자를 옵티머스 프라임 같은 차량에 실었다. 일의 특성상 장갑을 껴도 손과 손톱에는 항상 흙이 묻어 있었다. 집에 와서 샤워를 할 때 아무리 세게 문질러도 손톱에 낀 흙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손바닥의 경우 흙이 깨끗이 떨어져 나가도 묘한 황토색이 보였다. 처음엔 찝찝했지만 이내 신경 안 쓰고 생활했다. 그 손으로 요리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그럼에도 그 농장에 있는 동안 한 번도 배탈이 나거나 하지 않았다.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한 초기 무렵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그 덕에 일주일에 1000불 이상을 벌었다. 제일 많이 벌었을 때는 2000불 가까이 벌었던 것 같다. 결국 대박 농장이란 것을 체험했다. 하지만 이미 호주에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열정은 사라져 있었다. 그냥 남은 기간 동안 돈이나 모아서 돌아가겠단 마음이었다. 호주에 처음 왔을 때와 달리 무언가 뜨거운 것이 사라져 있었다.


#황금보다 황금빛 노을


 내가 사는 마을로 들어오는 초입에 KFC가 있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KFC에 들려 저녁을 사려했다. 간판에 “Thurs day special 9.99$ for a bucket”(목요일 스페셜 치킨 한 박스에 9.99$) 이라고 적혀 있었다. 한 박스에 치킨이 무려 15조각이나 담아주는 행사였다. 한국에서 치킨값이 15000원인데 호주에서 10000원도 안 하는 가격에 팔고 있었다. 물론 식료품 가격은 호주가 한국에 비해 훨씬 싸다. 마트에서 장을 봐 직접 요리해 먹는 것과 밖에서 사 먹는 것은 가격차이가 컸다. 하지만 그 KFC는 도리어 식비를 아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킨은 항상 옳다. 다음 주 목요일에도 Thurs day special이 있었다. 그다음 주도 그리고 그다음 주도. 어느새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 “Thurs day guy”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도 “You know what I want”라고 돼 받아쳤다. 나중엔 비싼 레스토랑에서 늘 먹는 것을 시키는 느낌으로 “The usual”이라고 말하니 그 직원도 유쾌하게 되받아 주었다.


 KFC 치킨을 구매한 뒤엔 댄 머피에 들려 그날의 할인 주류를 사다 마셨다. 주로 맥주를 한 박스 통째로 샀다. 그렇게 사면 병맥주 한 병에 1500원도 안 했다. 가끔은 양주를 사 마셨다. 덜덜이의 조수석에 맥주 한 박스와 내 팔로 한아름 잡히는 원형의 치킨 박스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일용할 양식을 덜덜이 옆에 태우고 석양을 바라보며 퇴근하는 길은 최고였다. 호주에는 고층 건물이 많지 않다 보니 어딜 가든 하늘이 잘 보였다. 슬슬 대지와 맞닿을 준비를 하는 태양도 선명했고, 낮은 지붕 위를 미끄러지는 황금빛도 늘 눈부셨다. 매일매일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 알 수 있었다. 매일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회에서 인정한 경로를 내 최선의 노력으로 이루기 위해 굳이 다투지 않고. 거대하고, 장엄한 꿈이나 목표가 없어도. 일생일대의 숭고한 도전이 없어도. 그저 하루하루 나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삶.


 어렸을 때 30 무렵의 나이이면 적당히 좋은 차에 양복을 입고 출퇴근할 줄 알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방 1~2개 딸린 공간에서 지낼 거라 상상했다. 퇴근 후엔 운동을 하거나 다른 취미 활도동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혹은 집에서 혼자 적당한 여유를 즐기는 삶을 살 줄 알았다. 저녁은 내가 적당히 요리해 먹으며 그렇게 잘 살 거라는 꿈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행복한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3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나는 상상과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흙먼지 잔뜩 묻은 옷차림에 차는 연식이 18~19년은 되는 똥차였다. 한국에서 자리 잡기는커녕 외국인 노동자 신세였다. 물론 내가 원해서 왔지만 고등학생 때 10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당시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그럼에도 그날 노을을 보는 순간 마음이 유독 편했다. 조수석에 있는 맥주 박스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치킨 만으로도 하루가 만족스러웠다.


 ‘진작 이렇게 좀 즐기면서 살걸. 내 마음에 여유를 좀 더 허락했어도 됐을 텐데’


 곧 비자가 만료되면 한국에 돌아가야 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해야 하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 현실이 불안하고, 답답했다. 눈앞의 노을덕에 이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서 나는 삶의 가치라 할만한 것들을 되짚어 보고 싶어졌다. 


 ‘미래의 경제적 안정만을 위해 현재를 그저 버텨내기만 한다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눈앞의 황금빛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까?’ 

 ‘나의 창고에 쌓인 황금 보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부서져 흐르는 황금빛 노을이 어쩌면 우리 마음을 더 가득 채우지 않을까?’


 매일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회에서 정해준 경로를  내 최선의 노력으로 이루기 위해 굳이 다투지 않아도 되는 삶. 거대한 꿈이나 목표가 없어도 그저 하루하루 나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삶. 학업, 취업, 결혼, 출산이라는 숙제가 뚜렷하지 않은 삶. 오로지 내 행복을 위해 어떤 선택을 내려도 그것 만으로 충만한 삶. 물질정 풍요보다 저마다의 정시적, 정서적 풍요를 더 가치 있게 봐주는 삶. 


어느새 이곳의 삶과 철학에 물든 내가 보였다. 그렇게 나의 영혼에 조국이 새긴 각인이 조금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서글펐다. 그간 곳간에 황금빛 벼이삭을 쌓느라 황금빛 하늘을 바라볼 여유도 못 누린 내가 참 안돼보였다. 충만한 맛과 씁쓸한 맛이 섞인 음식을 애써 삼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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