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는 독사와 독거미가 가득하다. 농장에서 일한다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붉은 등 거미다. 호주에선 이를 레드 백(Red Back)이라고 한다. 나도 진진의 닭농장에서 일할 때 레드백을 심심치 않게 봤다. 물려도 바로 조치를 취하면 괜찮아 그렇게 위험한 거미는 아니다. 조치를 취하지 못해도 1주에서 2주는 살 수 있다. 영화에서 처럼 물리는 즉시 엄청난 고열과 함께 사경을 헤맬 만큼의 독성은 아니다. 물론 이마저도 한국인 입장에선 충분히 위험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호주에서 레드백은 독거미 중 귀여운 편에 속한다.
호주에 있는 동안 레드백 이외에 독거미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간혹 그 크기와 생김새가 전혀 본 적 없는 거미들이 있었지만 독거미는 아니었다. 매번 이상한 거미를 발견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보여주며 농장에서 오래 일한 호주인에게 물어봤다. 늘 독거미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독거미를 본다면 농장 직원들과 무조건 공유를 해야 했다. 위험할 수 있으니 즉각적인 정보 공유는 중요했다. 하지만 내겐 독거미와 독이 없는 거미를 구분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거미는 전부 사진을 찍어 공유했다. 한 번은 깡충거미를 우연히 발견하고, 구경하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려는데 눈앞에서 갑자기 튀어올라 뒤로 나자빠진 적이 있다. 내 얼굴로 점프하려는 줄 알고 심장이 덜컥 내령 앉았다.(다행히 깡충거미는 아주 작고, 독성도 없다.) 진진에 있는 동안 아쉽게도(?) 레드백 이외에는 독거미를 본 적은 없었다.
아주 예전 티브이에서 우연히 큰 거미를 봤다. 마치 CG인 것 마냥 거대한 거미가 거미줄을 치고 있는 장면이었다. 티브이 속에서 한 남성이 그 거미 근처에 자신의 손을 갔다 댔다. 얼핏 제품 판매를 위해 제품에 손바닥을 갔다 대는 듯했다. 남자는 자신의 손을 거미에 들이대며 시청자들이 거미의 실제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했다. 그 거미는 성인남성의 손 만했다. 그러곤 그 거미를 집어서 자신의 팔 위에 위에 올리기도 했다. 다행히 그 거미는 공격성도 약하고, 독이 있으나 유독하지 않은 종이었다. 그럼에도 그 크기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나중에 그 거미가 호주에 서식하는 허츠먼 거미(Huntsman Spider) 임을 알게 됐다. (유사종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 서식하고 있다. 궁금한 사람은 구글에 ‘허츠먼 거미’를 검색해 보길 바란다. 하지만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그날은 여느 때처럼 퇴근 후 집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맥주 한잔과 함께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맥주를 들이켜는데 반대편 창문 위로 무언가 시커먼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 너머로 그 물체는 점점 더 자신의 위용을 뽐냈다. 시커먼 발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것은 창문틀을 넘어오더니 하얀 벽면 위에서 멈춰 섰다. 허츠먼 거미였다. 거미 전문가는 아니지만 처음 미디어에서 접했을 때 그 충격이 커 자세히 찾아봤다. 그때 내 DNA에 생존 본능의 각인이 새겨졌던 것일까? 나는 그 거미가 허츠먼 거미임을 단 번에 알아챘다. 무엇보다 그 거대한 크기는 허츠먼 거미가 아닐 수가 없었다.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종은 보통 성인 남성의 손 크기라는데 그 거미는 그보다 훨씬 커 보였다. 맹독성에 공격성이 높은 거미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 지식은 실전에서 큰 도움은 안 됐다. 눈앞의 거미는 내게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보였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와 샘이 거미 괴물을 마주 했을 때 그랬을까. 그들은 자동차 만한 거미와 맞서 싸워 이겼지만, 판타지 세상이 아닌 이곳에서 나는 저 거미를 어떻게 무찔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거미는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이 아닌 언제든 나를 잡아먹을 수 있는 베놈으로 보였다. 처음에 거미가 내 방으로 들어와 움직임을 멈출 때까지 나도 침대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채로 베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내 침대에서 방을 나가려면 거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소름 끼쳤지만 얼른 나가 해충약이든 빗자루든 저 괴물을 무찌를 전설의 무기 같은 것을 가져와야 했다. 프로도는 엘프들이 만들어준 검으로 거미를 무찔렀지만 내겐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치상황이 계속되던 와중 그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괴물은 몸을 천천히 돌리더니 다시 창문을 넘어 밖으로 사라졌다. 역시 온순한 종이 맞았다. 하지만 그 생김새와 크기는 절대 온순해 보이지 않았다. 그 괴물이 창문을 넘어가자마자 용기를 내 창문으로 다가갔다. 재빨리 창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었다. 옆의 창문들도 단단히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제야 묵혀 두었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숨을 토해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내 이마와 목덜미가 식은땀이 가득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