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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5. 2024

바다를 달리는 기차


 번버리 남쪽 차로 한 시간 거리에 부셀톤(Busselton)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기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주인공 치히로가 가오나시와 함께 바다열차를 타는 장면이 나온다. 바다열차는 호주의 부셀톤 제티를 모티브 한 것이다.


 타이거 스네이크에 물릴 뻔한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 주말을 이용해 여행을 갔다.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나니 마음이 요동 쳤다. 가뜩이나 고립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그런 일을 겪으니 생각이 복잡했다. 


 덜덜이와 함께 부셀톤으로 향했다. 마을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바다 열차를 탈 수 있는 곳에 가니 관광객들이 제법 있었다. 백사장 주변으로 공원이 이어져 있었고, 공원에는 바비큐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도 호주 사람들은 자연과 여유를 즐긴다’라는 문구가 잘 어울리는 한 폭이었다. 공원과 백사장 사이에 있는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작은 기차선로가 나왔다. 자갈길 위에 설치한 기차가 아닌 아스팔트 위 작은 홈을 파서 만든 선로였다. 그 선로의 한쪽 끝에는 기차를 정박하는 곳이 있었다. 다른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다가 펼쳐졌고, 그 펼쳐진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었다. 바다로 향하는 잔교가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위에 기차 길이 놓여 있었다. 곧 블루 하우스라는 이름의 매표소가 보였다. 표를 사고 기다리니 저 멀리서 바다열차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차 양옆으로 사람들이 고개와 손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이내 열차가 블루 하우스에서 멈췄섰고, 안내원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내렸다. 


 기차가 멈춰 섰을 때 궁금증이 들었다. 다시 바다로 나가려면 열차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선로는 하나였다. 정박소로 들어가 고개를 돌려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답답함을 느꼈을 테지만 호주 사람들이라면 느긋하게 기다릴 테니.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신기한 일이 펼쳐졌다. 기차의 맨 앞부분이 분리됐다. 기차 전체를 돌리는 것이 아닌, 머리칸만 분리해 반대편에 연결하는 것이었다.


 분리된 머리칸은 정말 아담하고 귀여웠다. 기관사가 그 귀여운 차량을 모는 모습은 마치 테마 마크에서나 볼 것 같은 장면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하며 사진을 찍으며 인사했고, 아이들은 기관사 뒤를 졸졸 따라갔다. 얼핏 장난감처럼 보였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동심이란 즐거움을 선사했으니 장난감이 맞았다.


 기관사는 상상할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수염 가득한 얼굴에 바다 빛에 그을린 피부와 인자한 눈 옆으로 퍼져있는 자글자글한 주름. 전형적인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 인상이었다. 기관사는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을 한껏 진하게 만드며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차 머리칸이 천천히 기차 옆을 지나 기차의 꼬리 부분에 붙었다. 기관사의 귀여운 도킹 작업이 마무리 됐다.


 기관사와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은 자리를 차곡차곡 채웠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경적이 울리고 기차가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밝은 웃음소리를 내며 이 동화 같은 경험을 잔뜩 누리고 있었다. 아이들 몇몇은 들뜬 마음이 주체가 안 됐는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서 낯선 생각이 피어났다.


 ‘기관사님은 매일 이런 행복을 선물해 주시는 건가? 매일 사람들의 밝은 미소와 행복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사시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렇게 매일 사람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선사하는 삶도 좋겠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삶이 훨씬 행복하겠다. 한 번도 이런 삶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훗날 웃을 수 있기 위해 오늘 당장 웃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으락? 아니면 내가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일까?’


 한국이었으면 천대받았을 직업. 무시받았을 삶. 나 조차도 그저 추억을 즐길 뿐 이런 삶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을 것 같았다. 늘 돈을 많이 벌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만을 바라밨다. 그리고 그런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외부가 정한 삶의 정답 같은 것들이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관사님의 삶을 선망하고 있었다. 그저 매일매일 사람들 웃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람차고 의미 있는 인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달리는 열차 아래를 보면 나무로 만들어진 교각이 보였다. 바다 열차라기보다는 육지 열차에 가까웠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사방이 무한한 푸름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조금만 멍하니 그 경치를 즐기다 보면 정말 바다 위를 달리는 듯했다. 


 바다 열차는 어느새 선로 끝에 다다랐다. 선로 끝에는 해저 전망대(Underwater Observatory)가 있었다. 전망대 뒤로도 교각은 조금 더 이어져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그곳에서 바다를 실컷 관찰하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나도 교각 한쪽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감상했다.


 바다를 감상하면서 마음이 편안 지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내 평온을 깨는 두 침투병이 있었다. 첫 째는 뱀에 물릴뻔한 사고가 일으킨 부정적인 감정들이었다. 그날 일이 마치 악몽처럼 지속적인 괴로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꿈에 나타나는 등의 트라우마는 없었다. 그 일이 발생했던 날도 공포심은 찰나였다. 내 첫 번째 침투병은 죽음에서 오는 무서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 경험이 불러일으킨 울분, 억울함, 허무 등이었다.


 호주에 와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단 생각이 들었다. 돈도 많이 못 모았고, 영어도 그저 기초 회화만 가능한 수준이었다. 여행을 했든, 호주에서만 해 볼 수 있는 문화체험을 했든. 그랬다면 추억이라도 만들었을 텐데, 돈 아낀다고 아무것도 못 했다. 3마리 토끼 잡으려다 이도저도 아닌 꼴이 됐다. 지난 2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깊은 성찰이나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목표를 추구했음을 깨달았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 채 나무의 열매만 열심히 맺으려 한 꼴이었다. 군대 2년, 호주 2년 도합 지난 4년간의 내 청춘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느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정해진 선로로 왕복만 해도 박수와 미소를 받는 제티(Jetty)가 새삼 부러웠다.


 해안가로 돌아오는 길엔 기차를 타지 않았다. 길게 뻗은 교각 위를 천천히 걷고 싶었다. 바다 위를 달리는 열차에 타 봤으니 이젠 내 발로 바다 위를 걸어 보고 싶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내 내면과 달리 지나치게 평화로운 바다와 햇살이 참 야속했다. 잔인하리 만치 이 세상은 내 감정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자연이 만든 아름다움에 경이와 서운함을 느끼며 내 안의 이율배반을 삼켰다. 자연이 주는 경치가 한순간이나마 평온을 가져다주는 듯했지만 두 번째 침투병이 들이닥쳤다. 두 번째 침투병은 한국에서 마주하게 될 현실이었다.


 덜덜이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동안 내가 나의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생각에 허무하고 우울했다. 아울러 곧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숨 막혔다. 늦은 나이에 복학, 도저히 적성에 안 맞는 전공, 이미 취업한 동기와 친구들, 어른들을 비롯한 주변의 눈치. 성공하기 전까지 절대 한국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떠났는데, 성공은커녕 실패 꾸러미만 한 보따리였다. 마주할 미래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조여왔다. 덜덜이 핸들 위의 손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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