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여전히 첫마디는 밥 잘 먹고 다니냐는 질문이었다. 이어서 아픈 데는 없냐고 물으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 용암처럼 목구멍에 뛰쳐나오려 했다. 애써 폭발할 듯한 욕구를 눌렀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교통사고가 났다. 길을 건너다 차와 부딪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래도 확인 차 병원에 들러 엑스레이를 찍었다. 의사 선생님이 내 척추 사진을 보고는 디스크를 조심하라고 했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mri를 찍어봐야 하지만 현재 에스레이 사진상 몇 번, 몇 번 척추 사이의 간격이 좁아져 있음을 알려줬다. 여기서 더 악화되지 않게 잘 관리하라고 했다. 아직 창창한 20대에 벌써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억울했다. 2년간 나라에 몸 바친 대가는 좋아하는 축구, 농구 등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편으론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어쩌면 믿기 싫었던 것 같다.
어학원에 다니면서 키친 핸드로 일할 때였다. 그때 3~4시간 동안 허리 한번 못 펴고 설거지를 해야 했다. 처음엔 괜찮더니 어느새 허리에 이상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통증이었다. 하루는 일하는 도중 허리를 늘리는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 척추를 따라 혈액을 비롯한 각종 액체들이 빠르게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액체는 내 머리를 강타하면서 강한 현기증을 불러일으켰다. 잠시 비틀거렸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때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의사 선생님은 축구나 농구 같은 격한 운동을 삼가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쭉 농구를 즐겼다. 특히 어학원과 설거지일이 일상이던 때 농구를 많이 했다. 일이 끝나면 허리가 아팠지만 도서관에 가 오전에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혹은 같이 수업 듣는 유타와 농구를 하러 다녔다. 유타는 농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유타덕에 퍼스 일본인 커뮤니티에 참석해 농구를 하기도 했다. 쉬는 날이면 유타는 나에게 농구하자며 연락을 했다. 나는 쉬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만큼 농구가 좋아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영어 실력을 더 빨리 많이 늘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를 위해선 개인 공부도 중요하지만 외국인 친구들과 많이 붙어 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타 무리에는 귀여운 친구가 있었다. 농구하러 가면 항상 그녀가 있었다. 이런 마음과 영어 실력을 늘리고 싶은 간절함은 허리 통증을 무마시켰다. 아니 애써 무시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허리가 아팠다. 여느 때처럼 자고 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던 통증이 더 거세져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어학원을 결석했다.
배 타는 일을 할 때도 하루 만에 잘린 것이 어쩌면 다행일 거라 생각했다. 내 몸으로 해낼 수 없는 육체 강도였다. 겨우겨우 버텼다 해도 허리가 다 망가졌을 것 같았다. 이후 닭 농장에서 일할 때는 다행히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퇴근하고 운동을 꾸준히 했고, 일터에서 허리에 안 좋은 자세를 취할 일이 없었다. 무거운 물건을 많이 날라야 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허리 통증은 오래 안 가서 다시 찾아왔다. 만다린 농장에서 일할 때였다. 캥거루 백이 오렌지로 가득 차면 무게가 7~8kg 정도 했다. 캥거루 백에 오렌지를 채워 넣을수록 허리와 목에 감겨있는 천이 나를 아래로 당겼다. 그 상태로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는 전체적인 허리 라인에 무리를 주었다. 이후 가구 공장에서 하루 종일 사포질을 할 때도 통증이 찾아왔다. 중간중간 허리를 펴주며 일하니 482 비자를 소지한 대만 친구는 내 작업 속도를 못마땅 해 했다.
엄마가 아픈 곳은 없냐고 물어본 그 순간 지난 호주에서의 삶이 편집된 채로 빠르게 스쳐갔다. 내 허리가 주인공인 짧은 영화였다. 엄마한테 사실 허리가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걱정 끼치기 싫어서 애써 이를 눌렀다. 하지만 가족한테 응석 부리지 않으면 누구한테 응석을 부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도 일었다. 태연함과 어리광 사이에서 망설이던 중 방 한쪽에 누워있는 캐리어가 보였다.
손잡이며 바퀴며 구석구석 망가졌고, 가죽은 군데군데 찢겨 있었다. 바퀴 하나는 없어진 채 3개만 외로이 남아 있었다. 남은 세 바퀴도 표면이 닳고 닳아 거칠었다. 손으로 문질러 보니 사포 표면보다 까끌까끌했다.
진진에 처음 도착한 날 캐리어의 손잡이가 부러 졌다. 상단 손잡이나 측면 손잡이가 아닌, 길게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손잡이였다. 많은 짐을 잔뜩 욱여넣은 채로 그동안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결국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는 여의봉 같은 부분이 약화 돼 있었다.
차가 없는 상태로 이사를 다니다 보니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녔다. 하루는 4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 깜빡하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채로 나왔다. 막상 길거리에서 캐리어를 다시 열어 선크림을 찾기가 귀찮아 그냥 걸었다. 햇살이 바늘처럼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호주의 여름은 한국처럼 습하지 않아 견딜만하다. 하지만 햇볕의 직접적인 뜨거움은 한국보다 강하다. 그래서 호주의 차들은 칠이 잘 벗겨진다. 사람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차량용 보호필름을 필수로 입힌다. 사람용 보호필름을 바르지 않았던 그날은 온몸으로 따가운 가시를 느꼈다. 고개를 반쯤 늘여 뜨린 채 헉헉대며 걸었다. 땀이 온몸을 적신 상태였다. 고개 뒤 쪽에서 둔탁하게 굴러가는 캐리어 바퀴 소리가 났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차보다 무조건 집부터 마련한다! 오갈 데 없이 나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서러운데, 온 가족이 이딴 경험을 하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이루지 못한 일(자가마련)을 그때는 그렇게 상상하며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이동해야 할 때마다 내 삶이 고작 이 가방 하나에 다 담기는 것 같아 허무하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캐리어를 들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캐리어가 덜컥 소리를 내더니 균형이 무너졌다. 뒤틀린 균형은 내 손에도 전달 됐다. 살펴보니 바퀴 하나가 빠져 버렸다. 빠진 바퀴는 내가 걸어오던 길 위에 처연 남겨져 있었다. 바퀴를 주워 다시 끼워 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바퀴가 빠진 것이 아니라 연결부가 부러져 있었다. 그날은 차라리 지나가는 술주정뱅이한테 심한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부러진 바퀴는 속상하다 못해 화를 불러일으켰다.
순간 머릿속에서 캐리어를 주인공으로 한 짧은 영화가 빠르게 상영됐다. 2년간 동고동락한 캐리어에 연민이 갔다.
‘너도 나 따라다니느라 고생 많았겠다’
계속 말이 없자 어머니가 돼 물으셨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어디 진짜 아파?”
“아니야. 아픈데 없어. 뭐 좀 생각하느라고. 다음에 또 통화해요”
봇물 터지듯 쏟아질 응석을 누르기 위해 얼른 전화를 끊었다.
‘엄마 나 허리 아파. 너무 아파서 10분도 못 앉아 있겠어. 그리고 얼마 전엔 죽을 뻔했어. 뱀한테 물릴 뻔했어. 나 힘들어. 그리고 여기 너무 외로워. 그런데도 한국에 가고 싶지가 않아. 한국에 가기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