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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5. 2024

소원을 말해봐

 번버리에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마트에 들렀다. 할인 품목이 매일 달랐다. 당일 할인하는  식자재가 내 저녁거리였다. 돈을 아끼기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느덧 장 보는 것이 재밌어 매일 들렸다. 나름대로 파스타 레시피를 연구하고, 요리하는 것이 재밌었다. 


 마트가 있는 건물에는 마트 외에도 식당, 카페, 주류샵 등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그중 복권 판매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호주는 복권 당첨 금액이 어마어마하다. 복권 종류별로 다르지만 최소 300만 호주 달러 이상 최대 1억 호주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 외국의 복권 당첨금이 한국보다 훨씬 많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의 놀라움이 덜 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포스터들이 복권 판매점 앞에 줄 맞춰 붙어있었다. ‘Jack Pot’, ‘power ball’이라는 단어와 함께 폭죽이 터지는 그림이었다. 각각의 포스터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적혀있던 당첨금은 군대 있을 때 TV에서 본 걸그룹만큼 눈부셨다. 마치 소녀시대 같았다. 그중 호주에서 당첨금이 가장 큰 Power Ball 복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들려 15불만큼의 복권을 구입했다. 최소 구매 금액이었다. 재미로 했지만 복권을 구매함과 동시에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호주 생활이 지치고, 힘들수록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속도와 그 스케일이 커져갔다. 당시 외국인이 복권에 당첨되면 즉시 영주권을 발급해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수 진작을 위해 복권에 당첨된 외국인이 본국보다 호주에서 돈을 쓰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역시 소문이었다. 전혀 사실무근인 이야기다) 당시에 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당첨 됐을 때 0이 여러 개 붙은 숫자와 “한국에 영원히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증서를 상상했다. 영주권을 받게 된다면 인쇄해서 방에 걸어둘 참이었다. 호주에 올 때만 해도 영주권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곳은 내가 미국의 영화학교를 가기 위한 통과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이젠 나의 도피처가 돼 있었다. 한국에 돌아갈 생각만 하면 숨이 막혀왔고, 그럴수록 호주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어느새 복권을 재미로 사지 않았다. 불과 15불에 내 미래를 걸고 있었다. 매주 복권 판매점으로 잔뜩 부푼 기대를 않고 갔다. 그리고 엄청난 실망감과 함께 새 복권을 다시 샀다. 한 주 동안 심심할 때마다 복권을 꺼내 보며 온갖 망상을 펼쳤다.


 ‘이 돈이면 한국 따위 안 가도 돼. 아니 한국에 가서 실컷 놀다 와야지. 엄마 아빠도 호주에 모셔와야겠다. 이 돈이면 평생 돈걱정 없이 살 수 있어. 미국에 있는 영화 학교도 갈 수 있어. 안 가면 어때. 이 평화로운 나라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면 되지. 돈만 있으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


 호기심과 재미로 시작한 취미 활동이 어느새 망상을 부추기는 일종의 도박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현실성이 없음을 어느 정도 알았을까? 다행히 복권 구매에 15불 이상 쓰지 않았다.


 그날도 습관처럼 복권 가게에 들렀다. 여느 때처럼 지난주 구매한 복권을 바코드를 리더기 밑으로 집어넣었다. 바코드 위로 불빛이 몇 번 반짝이더니 모니터 위로 문구가 하나 떠 올랐다.


 ‘Congratulation! You won!’


 그때만큼 심장이 요동친 적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믿기지 않았다. 나한테 이런 행운이 찾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다. 수많은 상상과 다양한 상상을 했지만 실제로 당첨될 거라 믿지 않았다. 딱히 내 팔자가 기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천운을 타고났다는 생각도 절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어쩌면 천운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소녀시대가 내게 지니를 데려왔다.


 이런 내 생각을 판매점 사장님이 읽었을까? 인상 좋은 호주 할아버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내 할아버지는 내게 말을 건넸다.


 “Would you like to exchange it for cash now?(현금으로 바꿔줘?)”

 “I’m sorry. I think I am supposed to go to bank. Plus, I don’t think this store has that much money in cash.(은행에 가서 받아야 하지 않아요? 이 가게에 그렇게 큰돈을 현찰로 갖고 있어요?)” 

 “Oh boy. This store does have that much money in cash.(오! 이 가게는 그만큼의 돈이 충분히 있어)”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Congratulation’이라는 문구 옆에 당첨금이 쓰여 있었다. ‘12.5$’(당시 환율로 약 10,000원). 나는 그 금액을 보는 순간 민망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께는 내가 착각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할아버지는 그 상황이 즐거우셨는지 괜찮다고 말하셨다. 나는 그 돈으로 다시 복권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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