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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16. 2024

내가 왜 이렇게 싫지?

 번버리 지역의 농장에서 일하는 첫 한두 달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 먹었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참지 않았다. 물론 과소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적당히 삶의 여유를 느끼면서, 악착같이 돈만 바라본 지난날의 아쉬움을 달랬다. 호주 사람들처럼 저녁 있는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무교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엔 교회에 나가 지역 커뮤니티와 어울렸다. 예전에는 무조건 영어 연습이 목표였지만 이제는 그저 사람과 어울리는 것 자체를 즐겼다. 처음에는 이렇게 내 안에 평화가 번지는 듯했다.


 어느덧 호주 생활에 많이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갔을 때 적응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한국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지만 호주는 기껏 2년 정도 머물렀을 뿐이니. 다만, 호주에서 사는 것이 점점 좋아졌다. 영화감독, 큰 명성, 거대한 부 따위는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성공을 향한 나의 갈망이 결국 사회에서 주입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이곳의 여유와 평범한 하루하루가 좋았다. 유학을 포기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곧 만료될 예정이었다. 이제 겨우 호주 라이프를 즐기기 시작했는데, 곧 끝나간다니 아쉬움이 몰려왔다. 처음부터 영주권을 목표로 삼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어느새 호주에 왔을 때 품었던 목표들도 흐려져 있었다. 유학 자금을 마련하고, 영어 실력을 늘리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았다. 마치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목표들이 흩어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적당히 열심히 일하고, 적당히 무기력하게 살아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일에 대한 열정은 이미 식어 있었다. 일은 하되,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몸도 마음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호주에서의 고된 노동이 쌓여서일까. 아니면 무기력함이 내 몸을 지배한 탓일까.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꾸준히 헬스장에서 운동한 덕분에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매일 파이프를 들었다 놨다 하며 데드리프트를 하다 보니 통증이 심해졌다. 몸이 아플수록 마음은 더 서러워졌다. 그 서러움에 죽을 고비를 겪으니 울분이 터졌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다가올수록 초조한 마음이 커져갔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복학하는 것 외에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이 없었다. 29살에 복학한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게다가 31살에 대학 졸업을 할 생각 하니 막막했다. 호주라면 31살에 대학을 다니든, 대학원을 다니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나이와 직책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에서 정해진 레일이 어느 곳보다 뚜렷한 세상으로 다시 갈 생각을 하니 위축됐다. 이미 레이스에서 한참 뒤처진 채로 다시 레일에 몸을 실을 생각을 하니 내가 참 후져 보였다. 귀국한다면 여권에 ‘도태’라는 도장을 찍어줄 것 같았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비교하지 않아도 사회적 비교의 화살이 매일 나에게 쏟아질 거라 믿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동기들이 하나 둘 취업한 소식이 들려왔다. 몇몇은 벌써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각자의 삶이 있다지만, 내가 호주에서 보낸 2년은 한국에서 전혀 쓸모없는 경력이었다. 기계공학 관련 회사에 취업하는데 설거지하고, 닭 똥 치우고, 오렌지 따고, 감자 캐는 일 따위가 스펙이 될 리 없었다. 


 ‘어쩌면 나는 한국 사회로부터 이곳으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호주로 모험을 떠나겠다는 결심이 한국 사회로부터 도망친 행위에 불과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심장이 요동쳤다. 


 ‘만약 내 행동이 온전한 회피였다면 지난 2년 동안 내 삶은 무엇이었을까? 이국적인 라이프 스타일에 도취되어 현실을 외면한 것이었을까? 가끔은 도망치고, 외면할 수 있다지만 황금 같은 20대에 무려 2년이나 시간을 허비한 것일까?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꿈은 다 허상이었을까? 나는 그렇다면 무엇이 하고 싶은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문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일하는 도중에도 잠깐의 틈새를 파고드는 뛰어난 스파이 같았다. 그 첩보원은 게릴라전에 아주 능했다. 순식간에 나를 괴롭히고 금세 사라졌다. 가끔은 무한히 증식하는 바이러스 같았다. 나쁜 생각의 연쇄 고리가 빠르게 증식하면서 절망 이외에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간다면 희망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도망쳐 온 곳이라면 이곳에 눌러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당장 영주권을 목표로 해도 취득까지 최소 4년, 많게는 10년은 필요했다. 그 마저도 장담 할 수 없었다. 육신이 정착할 곳을 모르니 영혼도 함께 표류했다. 당시 내 영혼은 한국과 호주 사이의 바다 어딘가를 떠다니고 있었다.


 갈피를 못 잡은 채 방황하는 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망각과 중독이었다. 퇴근 후 가볍게 즐기던 맥주 한 잔은 더 강한 관성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매일 취한 채로 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헬스장도 가지 않았다. 술에 조금씩 의존하기 시작했고, 술 없이는 불안한 마음을 달랠지 못했다. 집에서는 빨리 돌아와 복학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취기가 가져다주는 도피와 망각이 더 절실해졌다. 하루를 버티고 집에 돌아오면 걱정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왔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내게 뭐가 남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술을 마시는 것만이 그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조금씩 그 무게를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여전히 나는 같은 자리, 같은 고민 속에 있었다. 방을 나가기 싫었다. “어쩌면 평생 이 방에서만 살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고립감과 외로움에 괴로워하면서도 밖으로 나갈 용기가 안 났다. 한국에 돌아가기 겁났다. 그렇게 한참을 술렁이는 마음으로 술독에 빠져 살던 때 접한 Graham 아저씨의 부고 소식은 더 아프게 다가왔다.

 베개를 힘껏 움켜쥐며 슬픔, 분노, 우울, 좌절을 토해냈다. 베개에 얼굴을 깊게 파묻어 혼자 울며 소리를 질렀다. 큰 낭만과 희망을 품고 호주에 왔던 때의 내가 떠올랐고, 이내 그때의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 자식이 참 미웠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이게 아니었는데. 나 뭐 하지? 나 어쩌지? 왜 호주를 선택했을까? 왜 영화감독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사로 잡혔을까? 결국 호주 와서 아무것도 못했잖아. 집에는 걱정만 끼치고, 내 커리어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짓만 하고, 결국 친구들이랑도 멀어지고. 나는 왜 이리 시간을 헛되이 보냈지? 나는 왜 이리 못났지? 나는 왜 이렇게 한심하지? 왜 난 안되지? 난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렇게 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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