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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d 강상원 Nov 22. 2024

Ep13 여행의 이유와 기술

 Ted와 헤어질 결심


“그것만이 내 워홀 경험에 실패 낙인을 막아줄 것 같았다.”


#나의 흑조 선생님



 신체적, 심리적 에너지가 적은 채로 보내던 나날.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 검고 우아한 새.


 향수병은 없었다. 절대 고향이 그립지 않았다. 고향은 내게 무서운 존재였다. 이대로 적당히 호주에 눌러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을 찾아 본다면 어떻게든 방법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 또한 확신이 없었다. 당시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하루를 보냈다.


 어느날 올리버가 경찰 단속을 잘 살피라고 알려줬다. 퇴근길 어느 지점을 알려주며 경찰이 숨어 과속 감시를 한다 했다. 그 날 갓길에 있는 경찰차를 봤다. 옆에는 차량 속도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었다. 어차피 내 덜덜이는 과속을 못 하기 때문에 상관 없었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단속 지점을 잘 확인해 두었다. 그 뒤로 며칠간 해당 지점을 지날 때면 괜히 조심스러웠다. 호주는 벌금이 높았다. 하루는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경찰이 위치를 바꿔 단속하고 있을거라 여겼다.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달렸다. 


 바로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검고, 우아한 새가 유유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차에 내려 새를 관찰했다. 풀숲 너머 작은 연못이 있었고, 흑조 한 마리가 수면위를 미끄러지 듯 움직였다. 눈앞의 잡초와 갈대를 헤치고 더 가까이 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수풀을 헤치고 가기엔 내 키만한 잡초가 무성했다. 그리고 사이사이 위험한 곤충과 동물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농장에서 매일같이 독사를 보고 있어서 그 주변에도 독사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적당히 시야와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로 흑조를 관찰했다. 그저 새 한 마리가 둥둥 떠다닐 뿐이던 그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며칠간 그렇게 흑조를 관찰했다. 흑조를 바라보는 동안은 근심과 걱정을 덜 수 있었다. 유학 포기, 워홀에 대한 후회, 귀국에 대한 부담, 복학에 대한 스트레스 등.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나의 어둠을 조금씩 밝혀 나갔다. 안온한 검은 빛깔이 내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여행의 이유와 기술



 호주에 오기 전의 목표를 다시 상기해 봤다. 영어, 돈(유학자금), 색다른 경험. 노트에 이 세 가지를 적은 뒤 지난 2년간의 호주 삶을 되짚어보았다. 기억을 더듬으 내 현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그동안 세 가지 목표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꼼꼼히 따져 보았다. 돈 옆에는 ‘X’ 표시를 했다. 영어와 색다른 경험 옆에는 ‘△’를 그렸다. 이 중 돈과 영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호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 시간 안에 영어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 것 같지도 않았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없었다. 그렇게 영어 옆에도 ‘X’를 표시했다. 2개의 엑스와 한 개의 세모가 내 호주 워홀 성적표였다. 오직 '경험'뿐이 유일한 세모였다.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할 색다른 경험을 이 곳 호주에서 했다. 내 경험을 포장하기 위한 정신 승리가 아닌 사실이었다. 하지만 호주 워홀을 온다면 누구나 해봤을 법한 경험담이었다. 커뮤니티 등에 내 워홀 이야기를 올려도 조회수는 높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술자리 안주감거리에 불가했다. 하지만 남은 비자 유효 기간을 고려했을 때 유일하게 동그라미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라 생각했다. 유일하게 재수강 신청이 가능한 과목이었다.


 처음 호주에 왔을 무렵엔 호주 여행은 보류였었다. 유학 자금과 비상금까지 꽁꽁 싸매고 미국에 갈 작정이었다. 내 계획과 목표를 생각하면 호주 여행은 사치였다. 그럼에도 천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 채 호주를 떠난다면 그것만큼 후회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호주 여행은 잠정 계획으로 남겨 두었다. 이제 그 잠정 계획을 꺼내 현실로 바꿀 차례였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짜던 도중 의문이 들었다.


 ‘세 가지 목표 중 색다른 경험이란 목표를 세모에서 동그라미로 바꾸고 싶다며? 많은 워홀러들이 호주 여행을 하는데 뭐가 색다르다는 거야? 결국 나도 남들과 비슷한 경험 하는 거 아냐?’


 ‘그냥 평범한 여행은 안 돼. 특별해야 해. 나만의 여행이어야 해’


 약간의 강박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남들과는 다른 여행을 해야한다는 강박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일종의 도전의식이 고취됐다. 적어도 나만의 이야기를 여기서 만들고, 한국에가면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킬 수 있을것 같았다. 남들이 호주에서 뭐하고 왔는지 물어봤을 때 다른 워홀러들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고 싶었다. 그것만이 내 워홀 경험에 실패 낙인을 막아줄 것 같았다. 여권에 ‘도태’라는 도장 자국을 안남기게 해 줄 것 같았다. 나만의 여행은 무사히 한국 입국을 허락해 줄 일종의 비자로 느껴졌다.


 나만의 여행이 무엇일지 고민됐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매일 여행 정보를 수집했다. 지구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도시를 조사하고, 각각의 매력을 알아보는 일은 재밌었다. 호주 및 동남아시아 위주로 찾아봤다. 호주만 여행할지, 둘다 여행할지 고민이었다. 가능한 많은 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집착하지 않으려 했다. 여권에 찍힌 도장 개수가 꼭 의미 있는 여행으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각각의 여행지에서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이 더 의미 있을거라 믿었다. 찍은 사진 수보다 내면에 새겨진 다양한 정서가 더 중요할거라 생각했다. 


 나의 괴로움이 목표 좌절과 상실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꿈에 대한 내 가치관과 철학이 부재해서 온 것인지 알아야 했다. 즉 내면 탐구를 위한 여행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몇가지 원칙을 세웠다.


 1. 느림의 미학: 유명 관광지를 숙제처럼 돌지 말 것. 특정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그곳의 일상을 경험하기. 속도보다 깊이에 집중해 성찰의 여유를 제공하기.


 2. 자연 속에서 시간 보내기: 외부 자극에서 벗어나 고요함 속에서 내면 목소리에 집중 해 보기.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기기. 나와 세상을 연결 해 보기


 3. 미니멀리스트 여행: 필요한 물품만 최소한으로 챙겨 여행하기. 불필요한 소비하지 않기.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필수적인 것에만 집중 해 내적 자아에 몰두하기.


 4. 일지 작성: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기. 여행하며 느낀점 조금이라도 작성하기.


 여행 계획은 삶에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퇴근하면 늘 리쿼샾에 들러 술을 사기 바빴다. 하지만 여행이란 목표가 생기니 발걸음을 헬스장으로 돌릴 수 있었다. 여전히 어떤 여행을 할지 고민 이었지만, 여행을 위한 계획이나 자료 조사는 매일 했다. 구글 맵을 들여다보면서 여러 동선을 그려봤다. 그때마다 호주가 어마어마하게 큰 땅임을 느꼈다. 그렇게 호주가 단순한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대륙임을 실감하던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한다면!?’



 구글 맵은 자전거 경로를 검색할 수 있다. 내가 있는 번버리에서 아들레이드, 멜버른을 거쳐 동생이 있는 시드니까지 경로를 검색해 봤다. 자전거로 평원만 달리면 심심하니, 해안 도로 위주로 경로를 설정했다. 경로를 탐색 해 보던 와중 엄청난 사진을 발견했다. 장엄한 대자연에 압도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다.


 서호주와 남호주를 잇는 유일한 포장 도로인 Eyre Hwy가 있다. 총 길이가 1,675km이다. 샛길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상 외길로 봐도 무방하다. 더욱이 중간에 마을이 없고, 편의 시설도 드물다. 그럼에도 이 도로를 통과하고 싶었다. 그 길이 내 모험심과 도전욕구를 자극 시켰다.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간 중간 볼 수 있는 장엄한 광경이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분다 클리프(Bunda Cliff)’ 사진을 보는 순간 강력한 욕구가 솟아  올랐다. 그 풍경을 눈에 꼭 담고 싶었다. 분다 클리프는 거대한 절벽과 절벽 아래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를 감상 할 수 있는 장소다. 시기를 맞춘다면 근처에서 남방긴수염 고래를 볼 수 있고, 운이 좋다면 흑등고래까지 볼 수 있다. 아쉽게도 내가 여행을 떠다려던 무렵에는 고래를 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웅장한 크기의 낭떠러지 끝에서 수천년간 파도를 맞은 절벽 단면, 끝없이 펼쳐진 절벽 윤곽선, 절벽을 때리는 파도 소리, 호주와 남극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전거로 가로지르고 싶었다. 대자연을 온전히 느끼며 한 점으로서 존재하고 싶었다. 그렇게 단애(斷崖)에서 황홀경에 빠져들고 싶었다. 


 그렇게 루트를 짜고 나니, 자전거로 약 200시간이 나왔다. 매일 7시간씩 탄다면 한 달 안에 호주 남부 해안을 다 둘러볼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욕심이 조금 생겼다. 가능하다면 울루루(Uluru)도 다녀오고 싶었다. 시시각각 다른 빛을 반사하는 지구의 배꼽과 그 위로 쏟아지는 별. 자연의 황홀경에 흠뻑 빠지길 바랬다. 동생이 있는 시드니는 반드시 가야 했다. 그리고 호주에 왔는데 오페라 하우스를 못 보고 갈 순 없었다. 시드니에 도착하고 나서 동생과 함께 뉴질랜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과욕을 부리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지만 여행의 기쁨이 주는 고양감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새롭게 생긴 목표에 흥분됐다. 동시에 여행의 위험성 또한 인지했다. 한국은 어딜 가든 가로등과 편의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호주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다. 더욱이 지나다니는 차도 거의 없다. 내 여행 루트는 자칫하면 길에서 객사하기 쉽상이었다. 나는 위험성을 줄이면서 동시에 여행을 더 특별하게 만들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동행을 모집하기로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퍼스(Pearth) 지역을 기반으로 한 각종 여행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그중 활발한 커뮤니티 몇 곳을 골라 글을 올렸다. 상세 루트, 날짜, 예산 등을 적어서 포스팅했다.


 다음 날 페이스북에 접속하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다. 종모양 알람 표시에 엄청난 숫자가 기록 되었다. 마치 시뻘건 불이 난 것 같았다. 그것이 댓글이든 좋아요든 사람들이 엄청난 반응을 보여줬음이 분명했다. 흥분된 마음으로 글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사람들 반응은 뜨거웠다. 다만 내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뜨거웠다. 몇몇 사람들이  비현실적이고 멍청한 계획이라며 비웃었다. 이에 반응한 몇몇 사람들은 나를 옹호했다. 누군가 "What a stupid dream(바보 같은 꿈이네)"이라고 코멘트를 달면, 누군가 "No one is allowed to laugh at someone’s dream(다른 사람 꿈을 비웃으면 안돼)"이라고 되받아쳤다. 어느덧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서로 싸우기 바빴다. 여행의 현실성 여부는 더 이상 토론 주제가 아니었다. 개인의 자유, 타인의 삶에 간섭할 권리, 비난과 비판의 차이, 각자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 등. 이대로 놔두면 계속 싸울 것 같아 글을 삭제했다.


 사실 조금 비현실적인 계획임을 어느 정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부담도 있었다. 자전거로 애써 힘든 여행을 떠나려는 마음이야 그렇다 쳐도,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었다. 시간과 비용도 부담이었다. 동료 모집의 글은 수많은 경고 문구로 도배됐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 계획을 객관화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계획을 수정했다. 퍼스에서 아들레이드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자전거 여행은 아들레이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분다 클리프는 포기했다. 하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절벽위를 질주하고 싶은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레이드에서 멜버른으로 향하는 길목에 “그레이트 오션 로드(Great Ocean Road)”가 있다(정확히는 우회 경로지만). 이 도로에서 내 꿈을 이룰수 있었다. 게다가 그레이트 오션로드에는 “12사도 바위(The Twelve Apostles)”를 비롯해 더 멋진 경치가 있다. 계획을 수정하니 시간과 거리가 확 줄었다. 시간과 거리가 줄어든 만큼 비용도 아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동행은 구하지 않고, 나 혼자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여행하는 동안은 Ted가 아닌 내 한국 이름으로 다니기로 결심했다. 남은 호주 생활 동안 원래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집 앞 미용실에서 머리도 새로 자르고, 마트에 들려 염색약도 샀다. 완벽한 금발을 원햇는데 실패 했다. 



#소유보다 존재다: Good Bye 덜덜이



 하루는 퇴근길에 히치하이커를 봤다. 멀리서 봐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재밌는 경험이 될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그녀들을 태우기 전에 얼른 덜덜이를 몰았다. 그녀들은 퍼스에서 오로지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여자임에도 자기 몸보다 큰 가방을 각자 매고, 로드트립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덜덜이 뒷좌석에는 문이 없었다. 조수석을 앞으로 기울이고 타야 했다. 히치하이커 한 명이 뒤로 가 앉았다. 나는 다른 한 명은 조수석에 앉을 줄 알았는데 일행과 같이 뒤에 앉았다. 두 히치하이커 모두 자연스럽게 뒷좌석에 앉은 모습에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출발했다. 나는 “Where are you from?”을 시작으로 외국인들끼리 만나면 흔히 하는 질문을 던졌다. 프랑스에서 온 그녀들은 그저 단답으로만 대답했다. 대답을 하고 나면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 바빴다. 나는 어색한 공기를 깨고자 질문을 던졌다. “프랑스 와인과 이탈리아 와인 중 어떤 게 더 좋아요?”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두 나라가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치있게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좋은 질문이 될 것 같았다. 한 명이 “두 와인 모두 좋아”라고 대답하곤 핸드폰만 들여다보기 바빴다. 다른 한 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두 프랑스 여자 모두 전혀 소통하고 싶지 않아 보였다. 나도 조금은 짜증이 났다. 히치하이킹 매너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들의 태도는 예의없다고 느꼈다. 여행 도중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최소한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같았다. 나도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끼리 오가는 프랑스어만 침묵을 매웠다. 운전기사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대충 그들을 내려줬다. 우리 덜덜이에 그들을 태운 것이 후회됐다.


 그들의 행동이 비매너라고 느낀 이유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문화 차이로 인한 해프닝일거라 짐작했다. 예전 함께 살던 프랑스 친구는 미국의 스몰토크 문화를 무례하다고 말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개인의 자유보다 공공의 법도와 예의 등이 더 중요한 사회에서 자랐다. 호주인의 의연이 궁금했다. 다음날 출근해 올리버와 이야기를 했다. 올리버는 무례한 행동이라고 했다. 이어서 히치하이킹에대해 말했다.

 호주에 히치하이킹 문화가 있지만 주로 유럽 사람들이 한다고 알려줬다. 정작 호주인들은 대부분 차가 있어 히치 하이킹을 할 일이 드물다고 했다. 옆에서 듣고있던 또 다른 직원은 이들을 욕했다. Free Ride를 뻔뻔하게 요구하는 문화를 만들었다는게 이유였다(이 분은 연세가 제법 있었다). 그 무렵이 농장주가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여행을 하고 왔을 때였다. 농장주는 프랑스 여행이 최악이었다고 말했다. 음식과 볼거리는 최고였지만 사람들이 차갑고 별로라고 했다. 호주인 특유의 환영하는 태도와 프랑스인 특유의 시크함은 좋은 조합이 아니었다.


 그저 프랑스인 특유의 시크함을 맛본 경험으로 삼기로 했다. 다만 우리 덜덜이가 그닥 유쾌하지 않은 히치하이킹 경험을 한 점이 유감이었다.


 덜덜이는 오래된 똥차였다. 하지만 그 똥차가 나는 사랑스러웠다. 창문을 여는 것도, 차를 잠그는 것도 전부 수동이었다. 덜덜이 운전석 문은 밖에서 잠글 수 없었다. 운전석 문에 달린 차 키 구멍에 키를 꽂아도 키각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차에서 내린 뒤 운전석 잠금쇠 버튼을 누른 후 차문을 닫아야 했다. 즉, 차를 잠그기 위해 차키는 필요 없었다. 그래서 가끔 깜빡하고 차키 뽑지 않았고, 차를 잠가버렸다.


 처음 차키를 안에 놔두고 잠갔을 때는 당황스러웠다. 얼핏 옛날에 티비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며 옷걸이를 이용해 문을 열었다. 자동차 털이범 같은 좀도둑이 된 것 같았다. 철사로 된 옷걸이를 개조 해 갈고리 처럼 사용했다. 창문이 들낙거리는 틈새로 내가 만든 자동차 문따개를 집어넣었다. 적당히 들어갔다 싶었을 때 갈고리 부분을 살살 돌렸다. 무언가 걸리는 느낌과 함께 차의 잠금 장치가 들썩였다. 그것이 차의 잠금 버튼과 연결된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적당히 걸린 느낌이 들어 (옷걸이였던)문따개를 위로 당겼더니 잠금 버튼이 올라왔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날이 갈수록 능숙해졌다. 깜빡하고 차키를 놔둔 채 차를 잠그는 일은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번은 마당에서 차 문따개로 차 문을 열고 있던 도중 한 백인 아저씨가 지나갔다. 그는 날 의심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의 상상이 십분 이해됐다. 즉시 오해를 풀지 않으면 그가 나를 신고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을 보며 “Don’t worry. It’s my car. I locked it with leaving my key”(안심해도 돼요. 제 차예요. 키를 안에 놔두고 잠가버렸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손짓하며 계속 걸어갔다. 경찰이 오는 귀찮은 일이 발생할까 걱정됐다. 다행히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연식은 거의 20년이 되었고, 주행 거리는 15만km를 넘은 상태였다. 시속 80km만 되어도 차체가 흔들렸고, 100km면 크게 덜덜 거렸다. 게다가 시속 100km까지 속도를 내려면 한참을 달려야 했다. 어떤 스포츠카는 제로백이 5초도 안 걸린다는데 덜덜이는 5분은 필요했다. 와이퍼는 움직일 때마다 뻑뻑한 소리를 냈다. 창문은 어렸을 때나 봤던 회전식 수동 장치였다. 장치를 잡은채 마구 돌려야 했다. 그 마저도 조수석 창문은 다 내려가지도 않았다. 그만큼 낡고, 잔고장이 많은 차였지만 연비는 제법 좋았다.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자동차의 본질은 잘 지키는 덜덜이가 좋았다. 그냥 덜덜이가 예뻤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세차를 해 주었다. 시골길을 오다니니 금새 더러워졌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나이가 많은 덜덜이는 이미 겉면이 낡고 헤져 있었다. 새차를 해도 큰 차이는 없었다. 그래도 덜덜이를 아끼는 마음에 꼬박꼬박 씻겨 주었다.


 당시 무기력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허리는 아프고, 마음은 지쳐 있었다. 덜덜이도 똥차답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장 폐차 시켜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드를 열면 차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장비들이 많이 낡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왠지 쓰임새가 없는 내 처지와 닮아 보였다. 그럼에도 덜덜이는 내 출퇴근을 책임져 주었다. 심지어 나는 덜덜이가 아주 잘 달린다고 느꼈다. 덜덜이가 덜덜거리며 달릴 때마다 덜덜이의 마지막 불꽃을 나를 위해 태우는 것 같았다. 내 마지막 호주 일터의 왕복을 책임져 주는 덜덜이가 어여뻤다. 내 인생 첫 차와 쌓은 잠깐의 추억이 무척 즐거웠다. 그리고 덜덜이 덕분에 하나 배운 교훈이 있었다. 어떤 물건이든 내가 정붙이는 물건이 최고임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아끼는 옷, 아끼는 신발과는 느낌이 달랐다. 물건에 처음으로 고마움과 애잔함을 느꼈다.


 그런 덜덜이와 헤어질 때는 조금 눈물이 났다. 진진에서 알게 된 한국인 커플이 있었다. 그 동생들에게 덜덜이를 넘겼다. 내가 800불에 구매했다고 하자 동생이 700불에 넘겨 달라고 했다. 나는 600불에 넘겼다. 차키를 건네고 나서 덜덜이를 안아줬다. 호주의 뜨거운 햇살 때문에 덜덜이의 표면이 너무 뜨거웠다. 오래 안아주며 인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동생들과 인사를 나누고 길목을 떠나는 내내 덜덜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 동안 고마웠어’



#Ted와 헤어질 결심



 마지막 출근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 복권 판매점에 들렀다. 그날도 판매점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당첨을 확인했다. 운이 좋게도 "Congratulation" 문구가 떴다. 두 번째 당첨이었다. 이번에는 흥분하지 않았다. Jack Pot이 아님을 여실이 알고 있었다. 당첨 금액은 지난번과 동일했다. 할아버지는 지난번처럼 내게 당첨금으로 새 복권을 살지 현찰로 바꿔줄지 물어봤다. 이번에는 현찰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곧 이곳을 떠나 더는 복권 살 일이 없을 거라했다. 할아버지는 잘 지내라는 인사와 여행 잘 하라는 안녕을 건네주었다. 당첨금으로 샌드위치를 하나 사먹었다. 호주의 서브웨이 샌드위치는 야채의 신선함 덕분에 매우 맛있다. 호주에서 서브웨이를 자주 사먹었는데 그 날이 제일 맛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지난 날이 떠올랐다. 복권 당첨에 환상을 품고, 그 환상에 내 미래를 걸었던 시기.


 ‘만원으로 이런 맛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는데 왜 굳이 저런 도박에 집착했을까?’


 농장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이었다. 단순히 감자, 당근 농장의 마지막 출근이 아닌, 호주에서의 마지막 출근이었다. 농장 직원들과 차례차례 인사를 나눴다. 토마스도 그날은 내게 잘 지내라고 인사해 주었다. 테드 아저씨, 올리버와는 유쾌하게 인사를 나눴다. 스퍼드의 배도 평소보다 더 많이 쓰다듬어 주었다. 농장 휴게실 밑에 사는 고양이 가족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가끔 보이던 오리 가족과도 인사 할 수 있었다.


 농장을 돌아보며 마지막으로 실컷 달렸다. 사륜 바이크로 낼 수 있는 속도를 최대한으로 내며 신나게 질주했다. 그렇게 농장 전체를 돌며 그동안 일했던 곳과 인사를 했다. 중간중간 발견한 뱀들은 여전히 반갑지 않았지만, 귀여운 왈라비들이 드문드문 보여서 다행이었다.


 집에 오니 Ted 아저씨한테 문자가 와 있었다. 


 You are so cool man. It was great to spend the time with you. I hope you enjoy your trip.

(너 정말 멋지다! 함께 시간을 보내서 정말 좋았어. 여행 즐겁게 보내길 바랄게)


 내 방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호주에 있는 동안 늘 룸메이트 또는 하우스 메이트가 있는 삶을 살았다. 그 점이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나만의 공간을 누리고 싶었다. 물론 워홀러가 자기 집을 갖는 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하우스 메이트가 고작 한 두명인 집에 머무는 행위는 사치스럽다고 생각했다.


 번버리에 있는 동안 운좋게 그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집주인과 거의 마주치질 않았다. 집주인은 완전 집순이였다. 아니, 방순이였다. 자기 방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거실과 부엌에서 마주칠 법도 했지만, 그것마저도 드물었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옆방에서 살던 독일-대만 커플은 얼마 안 되어 나갔다. 그리고 내가 그 집을 나갈 때까지(일본인 친구 한 명이 중간에 일주일 머물렀던 것을 제외하면) 세입자는 더 없었다. 심지어 집주인이 길게 여행을 다녀온 적도 있었다. 내게 청소 및 집 관리를 부탁하며 그 기간 만큼의 집세도 공제 해 줬다. 그 집에 머무는 동안 집을 통째로 혼자 사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내 집같은 마음에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호주에서 머물렀던 다른 어떤 곳보다 더 편한 마음으로 공간을 누렸다. 그리고 이 점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는지, 집을 나설 때쯤 알 수 있었다.


 내 온전한 공간이 있었기에 감정의 폭풍을 허락할 수 있었다. 술, 외로움, 고립감 등의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서사를 거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괴로웠지만 필요한 서사였다. 한 껏 쏟아낸 덕분에 마음에 정화(淨化)가 이루어 졌다. 그 카타르시스 끝에서 새로운 꿈이 떠올랐다. 만약 룸메이트가 있었다면 그 공간을 오로지 나만의 감정으로 채울 수 없었을 터였다. 내 공간이었기에 배게를 부여잡고 울수도 있었고, 마음껏 술에 취할 수도 있었다. 내 방에서 혼자 KFC 목요일 스페셜과 맥주를 즐기는 날은 늘 최고였다.


 먼 이국의 한 시골 마을. 그곳의 허름한 집 작은 방에서 궁상떨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낡은 매트리스만 덩그러이 놓인 그 공간이 나처럼 초라하게 다가왔다. 그때는 차가운 바람에 살갖이 애리는 것만 느껴졌다. 그렇게 내 고립감을 고조 시키는 줄 알았던 그 공간이 사실은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내 부정적인 감정의 발산을 고스란히 받아주고 있었다. 나를 안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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