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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규 Sep 11. 2024

나의 인정 욕구

치매어르신들과 예배드리기

예배가 시작된다. 긴장된다. 오늘은 별 사고가 없기를 바라며 신앙고백을 시작한다. 드디어 설교시간이다. 열심히 준비한 설교를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도 ‘그’ 할머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아아아~~아아아~”. 그렇다고 입을 막거나 할머니를 제지하진 않는다. ‘그’ 할머니에게 이 고함은 당신만의 언어이며 의사소통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에게는 내가 잘 읽고 있던 설교 원고를 어디까지 읽었는지 까먹게 만드는 신비한 주문이다. 할머니의 주문은 대비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다음 단락에 대한 내용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난 프로, 아니 프로처럼 보여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드리는 예배는 내 앞에 있는 카메라를 통해 유튜브 라이브로 방송 중이니까. 멀리 사는 친구들이 가끔 한번씩 들어(?) 주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잠시 할머니의 주문에 주춤했지만 설교는 멈추지 않는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밑에 있는 설교 원고를 확인 후 아까 멈칫 했던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기 시작한다. 아뿔싸. ‘다음 단락’이 아닌 ‘다음 장’을 읽어 버렸다. 이미 엎지러진 물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아, 노래 부를 때가 아니다. 설교 원고 A4 5장은 너무 많다. 길다고 설교가 좋은건 아니지. 남은 4장에 충실하자.’ 라며 내 스스로를 다독인 후 설교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또 ‘다른’ 할머니가 벌떡 일어난다. '올 것이 왔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또 '다른' 할머니의 '언어'를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분은 아까 '그' 할머니와는 달리 소리 따위는 내지 않는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말씀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분이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라이브 방송을 내 보내고 있는 카메라를 지긋이 쳐다보며 가져갈지 말지를 고민하신다. 이는 마치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예배가 일상이 되어버린 작금의 세대를 심판하고자 하는 예언자의 모습을 닮았다. 하지만 결국 자비하심으로 카메라는 건들이지 않고, 대신 그 옆에 있는 헌금 바구니를 갖고 가신다. 헌금함의 존재 만으로도 예배당에 빈손으로 오는 자들에게 부담이 되기에 없애야 한다는 그 할머니의 뜻을 내가 잘 알지만, 그래도 핑계를 대자면, 한때 교회 장로님이셨던 할아버지가 습관처럼 내는 헌금 천원을 위해서 놔둔 헌금 바구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예배 후에 내가 되찾으러 가야 한다. 이렇게 4장남은 설교원고는 헌금 되찾을 생각을 하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3장만 남아버렸다.


이런 수 많은 이벤트와 함께 치매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 지도 벌써 6년이 넘었다. 사실 신학교 다닐 때 내가 생각한 나의 미래에 이런 목회를 하게 될 줄 상상조차 못했다. 내가 생각한 목회는 내 손길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뒤로 넘어지고, 내 설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회개하며, 내 기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병이 고쳐 지길 원했다. 그렇게 인정받으면서 많은 성도들이 생기고 돈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이것을 사용해서 더 크고 위대하고 훌륭한 일들을 하려고 했다. (물론 이런 노골적인 표현으로 상상하지 않았다. 적당히 성경말씀 묻혀가며 상상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는 표어를 붙이고 거대한 성전 봉헌식도 사실 내가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허름한 강대상 하나 두고 치매 어르신들과 예배를 드리는 중이다. 이곳에는 내 손길에 뒤로 넘어갈 성도들이 없다. 다만 가만히 걷다가도 뒤로 넘어가는 어르신들을 붙잡아야 하는 손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곳에는 내 설교를 알아 듣고 울며 회개할 성도는 없다. 다만 설교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회개시킨다. 특히, 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아멘, 아멘" 외치시다가 막상 설교 끝나고 다가가 악수하면 “자넨 누군가?” 라는 질문으로 노자의 호접몽과 같은 가르침을 내려주시는 분도 계신다. 이곳에는 기도를 해서 병을 고쳐야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다. 어쩌면 내가 병에 걸린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들고 기도하게 한다. 돈이라는 맘몬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 입장에서 봤을때에 치매 걸린 사람이 오히려 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돈과 권력 없이도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렇게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것 처럼 인생도 마무리 되면 좋겠지만 아직 계속 살아내야 한다. 평생에 걸쳐 섬김의 손길을 배워야 학고, 몸의 설교를 외쳐야 하며, 어린아이 처럼 되길 기도해야 한다. 그렇게 나는 치매 어르신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젊었을 때 빽빽하게 적어 둔 나의 인정 욕구를 지우개로 깨끗이 지웠다. 그럼에도 신학생 시절에 꿈꿨던 그 인정욕구는 아직도 남아있다. 마치 지우면서 종이 위에 흩뿌려진 지우개 똥 처럼 내 마음에 여전히 흩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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