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은 환상을 본다. 그의 환상 속에서 본 짐승과 뿔들은 이 땅의 권력들을 상징했고 그 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며 모든 믿는 성도들을 잡아 죽였다. 다니엘은 감당할 수 없는 환상으로 인해 죽은자처럼 된다.
물론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그 짐승의 나라를 정리한다는 환상을 동시에 봤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버텨내야 하는 그 짐승의 나라의 권세와 힘,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그는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그렇다. 사자굴에 들어갈 만큼의 담력을 가졌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기적을 체험했지만 그딴 체험은 이 짐승의 나라 앞에선 기적 축에도 못들어가며 어쩌면 한번 위기를 넘긴 정도의 요행에 불과할 뿐이었다.
미사일이 내가 사는 옆 동의 아파트에 떨어졌다고 순간 나는 살았다고 간증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이치였다. 이 미사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떨어질지 모른다. 이 짐승의 나라의 실체를 봤을 때에는 그 어떤 기적도 그를 지킬수 없음을 알았다. 다만 하나님의 최후 심판까지 이 짐승에게 유린당하면서도 버틸수 있는가? 라는 질문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 절망과 좌절에 가득 찬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를 세운 후에 무언가를 요구하다거나 어떻게 맞서 싸우라고 요청하지 않으신다. 그저 이 짐승의 나라에서 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서 있기를 요구하실 뿐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의인 10명을 찾았듯이 그 심판을 면하게 해줄 의인이 바로 '사람' 이었다.
하나님에게는 이 짐승의 나라에서 그저 온전히 서 있을 '사람'이 필요하다.
전쟁과 폭력,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기후의 위협, 돈과 권력의 온갖 불법과 빈부격차, 사람들을 등급화 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살해하고는 자살이라고 책임을 떠미는 짐승의 나라. 우린 이 실체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점점 짐승의 방식에 익숙해지고 짐승으로 살아갈 때에. 거대하고 숨막히는 짐승의 힘과 악취 앞에서 그저 무기력할지라도 사람으로 남아있을것을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요구했고 이 요구 앞에 다니엘은 그저 죽은 자 처럼 무기력한 자신의 무릎과 다리를 부축해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서 그 자리에 겨우 서있을 뿐이었다. '사람'으로. 이것이 신앙이다. 사람으로 겨우 서 있는 것.
우리들이 하나님의 환상을 본다는 것은 이런것이다. 진짜 짐승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무기력하지만 그 짐승의 방식에 넘어가지 않고 한 '사람'으로 남아서 그자리를 지키는 것.
하지만 이 일에 앞장서야 할 교회는 이미 자신이 섬기는 금송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10월 27일 동성애자를 불태우는 마녀사냥축제에 참가하기위해 들떠있다. 어쩌면 예수님 앞에서 간음한 여인처럼 끌림당할 소외된 자들을 위해 돌을 먼저 내려놓아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되려 앞장서서 설치는 꼴을 보면서 한국교회에 대한 모든 일말의 희망을 버렸다. 그리고 난 '사람'으로 남기로 택했다.
무엇이 적인지 아군인지 피아식별도 못하고 더 이상 하나님의 환상을 볼 수도 없는 이 집단은 신천지와 다를바 없다는게 내 결론이다.
제발 우리 짐승은 되지 말자. 200만명 모여서 한다는 짓이 성 정체성으로 인해 혼란을 겪고 있는 가장 약한자들에게 죽창을 꼽는 짓이라니...
정작 짐승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그 분풀이를 지나가는 약자에게 어깨빵을 하는 양아치 같은 집단. 그게 지금 한국 교회의 실체다. 양아치같은 새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