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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섭정

by 산내

기원전 370년대의 일이다.
한괴가 한나라의 재상일 때 엄수가 애후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한괴와 엄수 두 사람은 서로 시기했는데, 어느 날 조정에서 의논하다 엄수가 대놓고 한괴를 가리키며 잘못을 지적했다.

그러자 한괴가 조정에서 엄수를 심하게 꾸짖었고, 이에 엄수는 칼을 뽑아 달려들어 사사로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마침 사람들이 말려서 미수에 그쳤지만 이 일로 엄수는 국외로 달아났다.
이후 한괴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할 날을 기다리는데 제나라에서 어떤 사람이 엄수에게 알려주었다.

"지땅 심정리의 섭정이 용사입니다.
지금 원수를 피해서 도살장에 숨어들어 백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엄수는 슬그머니 섭정에게 다가가 후하게 대우를 해주었다.
섭정은 의아했다.

"어른께서는 저를 어디에다 쓰시려고 이렇게 대하십니까?"

엄수는 슬쩍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내가 그대에게 도움을 준지 얼마 되지도 않고 지금 대접도 부실한데 무슨 바랄 것이 있단 말입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는 섭정에게 대단한 공을 들였다.

섭정의 노모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황금 100일을 건네자 섭정은 놀라서 한사코 사양했다.

"저는 비록 노모를 모시고 집은 가난하여 떠돌면서 개나 잡는 사람이지만, 아침저녁으로 맛있는 것을 올려 어머니를 모시고 있습니다.
어머니 모실 준비는 다 되어 있으니 어른께서 주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엄수는 사람들 눈을 피해 슬쩍 본심을 흘렸다.

"나는 한나라에서 원수를 지고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는 처지입니다.
지금 제나라에 와서 족하의 의기가 높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백금을 드리는 것은 그저 노모의 거친 식사에 보태라는 것이지 무슨 다른 청이 있겠습니까?"


섭정은 완곡하게 거부했다.

"제가 뜻을 낮추고 몸을 욕보이면서 시정에 살고 있는 것은 그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는 기쁨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데 남에게 감히 몸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엄수는 기어이 금을 주려고 했으나 섭정은 받지 않았다.

한참 후 어머니가 운명하자 섭정은 결심을 굳혔다.

"아! 나는 시정에서 칼을 들고 짐승을 잡는 이요, 엄수는 제후의 경상이었다.
그런 그가 천리를 멀다 않고 나를 찾아와 수레를 굽혀 나와 친교를 맺고자 했다.
내가 그를 너무 박하게 대했고, 그를 위해 세운 공도 없구나.
그는 내게 백금을 주며 어머니의 장수를 빌어주었다.
내 비록 그 돈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를 알아준 것은 틀림없다."


장례를 마친 섭정은 엄수를 찾아가 물었다.

"전에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묻겠습니다.
중자께서 원수를 갚고 싶다는 이가 누구입니까?"

이리하여 엄수가 자기 원수는 한괴이며 그는 군주의 계부이기도 해서 단단한 호위를 받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엄수가 거사를 도모할 준비를 해주겠다고 했으나 섭정은 거부했다.

"지금 우리는 한 나라의 재상을 죽이려 하고, 하물며 그는 군주의 친족입니다.
이런 형세에는 사람이 많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득실을 따지고, 득실을 따지다 보면 모의가 누설됩니다.
누설되면 한나라가 온 나라를 들어 중자와 원수를 맺을 것인데, 이리하면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섭정은 칼 한 자루만 들고 한나라로 떠났다.

그때 한나라는 동맹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병기를 들고 호위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나 섭정은 개의치 않고 곧장 연회장으로 들어가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바로 한괴에게 달려들었다.

한괴는 도망치다 황급히 애후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섭정은 한괴를 찌르고 애후도 찔러버렸다.
이런 아수라장에서 섭정은 그 외에도 여러 명을 살해했다.

그러나 끔찍한 장면은 그다음이다.

그는 바로 자기 얼굴 가죽을 발라내고 눈알을 후벼낸 후 배를 갈라 창자를 쏟으며 죽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섭정이 죽은 후 한나라는 이 자객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시체를 거리에 눕혀놓고 거액의 현상금을 걸었지만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여인이 다가와 시체 위에 엎드려 목놓아 울었다.

"네가 지금 죽어서 이름도 남기지 않은 것은 분명 부모 형제도 없는 마당에 나를 보호하려는 심사였겠지.
내 몸을 아껴 동생의 이름을 버리는 일은 차마 못하겠노라."


그녀는 시체를 안고 울면서 외쳤다.

"이 이는 지땅 심정리 사람 섭정이다!"

그러고는 시체 옆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는 섭정의 누나였다.
그러자 삼진은 물론 초와 제나라 사람들도 "섭정의 실력도 대단하지만 그 누나도 열녀로다" 하고 찬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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